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eisty Fox Aug 29. 2024

미국회사 동료이야기. P에 대하여

P는 유명한 팝가수 Taylor Swift 가 태어나 자란 동네 출신이다. 


그래서 인지 그녀와 Taylor Swift는 무언가 많이 닮았다. 어깨 까지 오는 금빛 머리. 날씬하고 근육이 탄탄하게 붙은 팔. 첫 만남부터 Y'all 을 거리낌없이 말하며 고상한 척 하지 않는 그녀. 


처음 P가 우리 팀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 나는 반신반의 했다. 그녀의 이력은 기이하리 만큼 (사실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거친 나보다 더 하겠느냐만은) 다양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경력이 있었고 그 중 최고는 미국 올림픽 국가 대표 선수로서 Track and field 분야에서 프로페셔널 선수로 있었다는 것이다. 



P는 인터뷰를 볼 때부터 거침이 없었고 우리 팀 최종보스를 포함한 많은 사람을 사로 잡았는데 팀에서 유일하게 전혀 미국적이지 않은 성격을 가진 나와 인도 동료는 그런 그녀의 '나대는' 태도가 우리와 결이 맞지 않다고 느꼈다. 

나보다 약 1년 2개월 정도 늦게 회사에 들어온 P는 약 2주만에 나의 파트너가 되었고 역시나 수많은 사람을 사로 잡았다. 들어오자 마자 모든 자료를 섭렵하고 큰 미팅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우리 부서의 스탠스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발표하는 P를 보면서 안심도 되었지만 왜 나는 시간이 지나도 저렇게 하지 못할까 하며 조금 허탈감도 느껴졌다. 


아무튼 P와 처음 1:1 미팅을 하게 되었을 때, 올림픽 선수였고 체력적으로나 업무능력으로나 무언가 나보다 한참 앞서 나가 있는 것 같은 그녀가 편안하게 다가오길래 괜한 거부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떨떠름하게 거리를 두었지만 P 특유의 친화력에 말려들어(!) 약 4개월이 지난 지금은 엄청난 내적 친밀감이 생겨 그녀와 매주 단 둘이 얘기하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하루종일 수도 없이 많은 미팅에 들어가 긴장하며 하루종일 보내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너무 지쳐있던 어떤 날 오후에 그녀와의 1:1 미팅에 예의 상 "How's your day going?" 이라고 물어봤는데 P는 오늘은 자기가 이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아마 오늘이 최악의 날일거라고, 조금 전 미팅에서 자기를 바보취급하는 최악의 피드백을 들었다고 얘기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일단 이렇게 솔직하게 자기의 좋지 않은 상황과 기분을 이야기 하는 사람은 미국 동료중 처음이고 지금의 회사에서 나에게 마음을 이 정도로 열고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별로 없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리고 나도 그날 너무 힘들었고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겠어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더니 는 P는 "야.. 나 다음주에는 괜찮을거야" 라고 말하면서 다음 주제로 가볍게 넘어갔는데, 그 기분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기에 그녀의 정신력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아마 나였다면 그 날 하루 아무일도 할 수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루를 잘 마칠수 있었다. 


내가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적도 있었다. 얼마 전 수십명이 참석한 미팅에서 누군가의 날카로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다 엄청난 망신을 당했던 그날. 난 미팅이 끝나고 (재택근무중이었기에) 한시간을 엉엉 울었고 아마 회사에서 잘리거나 사람들이 나와 더이상 일하기 싫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P는 나에게 어제 미팅 잘됐던데? 하며 날카로운 질문을 한 사람은 원래 성격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침울해 있지 않아도 된다며 그냥 그 사람이 알고 싶어했던거 같이 준비하자며 이야기 해주었다. 나의 커리어를 뒤 흔든 인생최대의 망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녀가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하니 그날의 사건은 그냥 함께 준비해서 대응하면 되는 일이 되었고, 나에게 힘을 주는 그녀의 말은 가벼웠지만 준비해 준 자료는 놀랍도록 완벽했다. 그 미팅이 끝나고 나서는 눈물이 났다. 힘을 내보자 라고 메모장에 적었다. 


나와 P는 너무 다른사람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아마 나는 그녀의 세계를 영원히 경험해 볼 수 없을 것이고 그녀도 내가 자라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접점이 만들어지며 아마 나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배울것이고 나의 세계는 조금 더 넓어질 것이다. 

미국에서의 직장생활은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것 같다. 많은 날들은 생각이 흐릿하고 정리도 쉽지 않다. 내 생각은 말로는 더 안나오고 남을 설득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순간순간 엄청 밝은 플래쉬 라이트를 들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다. 



 

작가의 이전글 시부모님, 혹은 멋진 할머니 할아버지 그 어딘가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