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사랑의 모습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것들이 모두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은 모두가 경험적으로 안다. 그 중에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구심이나, 다른 이에 더 큰 관심을 쏟는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질투 역시 포함된다. 여기에 합리적인 근거 따위는 필요 없다. <질투>(2012)의 감독 필립 가렐이 말했듯 “질투라는 감정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질투>에서 관객이 우선적으로 느끼게 될 감정에 집중해보자. 흔히 말하는 멜로 영화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우리 삶에 가장 맞닿아있는 연애 경험의 재현을 스크린에서 배우들의 얼굴로 보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이 중에서도 <질투>는 자신들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침착하게 감내하는 인물들을 흑백으로 마주한다. 이렇듯 스산하도록 절제되어 있기에 관객은 울음을 터뜨리기보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작품의 서사적, 감정적 결을 그저 따라가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관객 본인의 경험으로 치환하여 받아들이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 인간 모두는 신이 변용되어 양태로 표현된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능동적인 신의 본성과 달리, 부분적으로만 능동적이어서 그 자체로 실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양태들의 실존을 결정짓는 것은 양태들 간의 외적인 관계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끊임없이 외부와 관계를 맺으려 한다. 이렇게 생겨나는 인간 관계는 그 사람에게 정념을 유발한다. 여기서 기쁨과 슬픔의 정서가 생겨난다. 이 두 정서가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타날 수도 있다. <질투> 역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다. 클로디아의 경우는 같은 사람에게서 두 정서를 모두 느끼는 경우이다. 클로디아는 1막에서 자신에게 기쁨의 정서를 주는 루이에 대한 사랑에 친구와 만나다가도 갑자기 집으로 달려와 루이를 찾고, 배우인 그를 극장에도 보내주지 않으려 한다. 클로디아는 루이와의 관계에서 한없는 기쁨을 느끼기에 그와의 관계에 더욱 매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 장면에서도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던 루이는 극장에 가야만 하고, 그가 가버린 뒤 클로디아는 혼자 남아 책을 들고는 있지만 불안에 싸여 집중하지 못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루이를 향한 사랑에서 기쁨을 느꼈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이제는 슬픔의 정서에 사로잡힌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슬픔의 정서는 스스로에게 긍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클로디아는 새로운 기쁨을 찾으려 홧김에 술집에 가 다른 남자를 만나기도 하지만, 루이를 사랑하기에 결국 다시 집에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질투는 결국 클로디아에게 깊은 슬픔의 정서를 유발하여, 상대의 사랑도 왜곡하여 받아들이게 만든다. 인간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사람과는 가까이 지내려 하지만, 슬픔을 얻게 되는 사람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2막에서 클로디아는 새 직업을 얻는다. 루이에게 이를 말할 때 이제 돈을 자신이 벌어오기에 루이가 극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루이는 그를 사랑하고 이 장면에서도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지만, 클로디아는 이를 자신만의 논리로 곡해해 스스로 상대에 대한 감정마저 정리하기 시작한다. 극장 동료나 극장에서 처음 본 사람과 키스하고 손 잡는 루이의 장면은 클로디아가, 혹은 질투가 혼자 만들어낸 상상에 더 가까워보인다. 하지만 이를 본인의 경험에 대입해 받아들이는 관객은, 일견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클로디아의 질투에 공감하여 그의 “말 같지 않은 소리”에 심정적으로 기꺼이 동참하려 하게 된다. 우리 역시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지만, 질투하여 사랑을 끝내곤 해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질투하며 상대에 대한 근거 없는 상상을 펼치고, 혼자 감정을 정리하며 상대에게 상처를 주려는 바보 같은 행동들은 거울을 보듯 클로디아에 투영되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상대에게 상처를 준 뒤 마치 상대가 내게 더욱 많이 사랑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미안해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혹은 내가 근거 없이 만들어낸 상상이 현실이라고 내 마음대로 확정하고, 그 공상 속 잘못에 대해 사과해주기라도 바라는 듯이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를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낭만적 테러리즘’으로 규정했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 … (그러나) 테러리스트는 결국 불편한 현실, 사랑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클로디아는 자신의 낭만적 테러리즘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상으로 루이에게 잘못을 씌운다. “테러리스트적인 삐침이 구조적으로 성공을 거두려면 아무리 사소하다고 하더라도 삐치게 만든 쪽에 어떤 잘못된 행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루이는 클로디아를 “무의식 속에 뿌리박힌 것”처럼 변함없이 사랑해왔음에도 결국 클로디아는 이미 마음 정리를 끝내고 결국엔 집을 떠나고야 만다. 그러자 루이는 이전에 친구들과 얘기할 때 언급했던 베르테르처럼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이것은 어쩌면 클로디아의 상상 속 낭만적 테러리즘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부분 아닐까. 이제 그는 다른 이에게 가겠지만 루이에 대한 질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쓴 전남편의 아내의 모자를 보는 클로틸드의 표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