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교사들과 교육학 수업을 하다 보면 토론 단계에서 늘 귀착하는 곳이 있다.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 해결 방안을 논의할 때 거의 모든 쟁점에서 이상과 현실 측면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어떤 해결책이든 "이상적으로는 공감하는 데 현실에선 작동하지 않는다"라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 개선의 난해함을 이처럼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그동안 혁신교육을 표방하면서 정책을 펼쳐오던 이들 역시 항상 마주하던 고민거리다. "당신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아. 하지만 현실에선 다른 논리가 작동하지." 결국 교육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이상을 목표로 하여 현실의 문제를 개선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인데, 누구나 생각하듯이 이 작업이 쉽지 않다.
우리 교육의 풍경이 전쟁터를 닮았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학생들은 더 높은 점수를 향해 '질주'하고, 부모들은 자녀의 서열을 확인하며 '안도'하거나 '불안'해한다. 이 치열한 경합의 중심에는 뿌리 깊은 관점인 '선발적 교육관'이라는 견고한 패러다임이 자리 잡고 있다.
희소한 사회적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될수록, 이 교육관은 마치 자연법칙처럼 우리 삶을 지배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 관점은 정부의 성격과 무관하게 사실상의 주류적 관점으로 시민들의 삶을 지배해 왔다. 어떤 이는 성장 동력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교육을 나락으로 밀어 넣은 주범이라고 말한다.
선발적 교육관의 논리는 명료하다. 한정된 기회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공정한 방법은 객관적 측정이며, 현재는 시험만큼 효율적인 도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체제는 나름의 합리성을 지닌다. 가시적 성과로 줄을 세움으로써 절차적 공정성을 확보하고,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교육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다. 학습은 성장이 아닌 경쟁의 도구로 전락하고, 협력은 사치가 되며, 실패는 낙오를 의미한다.
'발달적 교육관'은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 학생이 '현재 무엇을 얼마나 아는가'보다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가'를 묻는다. 결과보다 과정을, 서열보다 성장을, 경쟁보다 협력을 지향한다. 과정중심평가와 성취평가제의 도입은 모두 이러한 철학적 전환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발달적 교육관은 여전히 현실의 벽 앞에서 주춤거린다. "그래서 누가 서울대에 갈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모든 아이는 저마다의 속도로 성장한다"라는 답은 무력할 뿐이다. 선발의 공정성이라는 사회적 요구를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서, 발달적 교육관은 어떻게 설득력을 확보할 것인가? 헌법도, 교육기본법도, 초중등교육법도 학생들의 '전인적 발달'을 외치건만 이렇듯 철저하게 괴리하는 현실은 누가 책임을 질까.
문제는 두 교육관을 양자택일의 관계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에 있을지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지식교육의 엄정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전인적 성장을 도모하고, 건전한 경쟁을 통해 협력의 가치를 체득하게 하며, 개인의 수월성과 공동체의 형평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교육이다. (늘 말로 하기는 쉽다.)
이를 위해서는 총체적 혁신이 필요하다. 대입제도는 다양한 재능과 가능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수업은 지식 전달을 넘어 사고력과 창의성을 기르는 방향으로, 평가는 줄 세우기가 아닌 피드백과 성장의 도구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변화가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갖춘 신뢰할 만한 정책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역시 말로는 쉽다)
혁신교육이 직면한 과제는 명확하다. 학문적 엄밀성을 유지하면서도 삶의 역량을 기르고, 개인의 성취를 독려하면서도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며, 현실의 요구에 응답하면서도 교육의 본질을 지켜내는 것. 이 긴장 속에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 교육이 걸어가야 할 길일 것이다. 모든 실천 전략은 이를 목표로 수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 논리' 앞에서 이상에의 추구를 멈추었던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오는 의견이 교육이 정치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에 따라 국가교육위원회를 만들었는데 결과도 과정도 좋지 않았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무용론이 나오는 까닭이다. 한때는 교육부 해체론이 있었지만 정권을 획득한 후 지금은 교육부 역할론이 힘을 받고 있다.
일천하기 짝이 없는 내 경험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개선하기 위해선 적절한 시간과 적절한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은 정권 초기가 가장 적절한 시간이라 말하고, 최고 책임자의 명령이 살아 있을 때가 '골든 타임'이란 말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교육을 바꾸는 데 무슨 특별한 시간이 필요하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나는 교육에 관한 한 '필요한 과제'를 '적시에 해결'하지 못했을 때 오는 후과가 더 크다고 늘 생각해 왔다. 시간이 꽤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