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석희와 김어준의 경우
손석희는 ‘질문들’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나는 유튜브를 보지 않는다. 알고리즘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를 포함한 시청자들은 이 발언을 손석희의 언론관으로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그 말을 ‘유튜브를 전혀 보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발언을 정정했다.
“과장되게 알려져서 그렇지, 아예 안 보는 사람처럼 됐는데 그렇지 않다. 어떻게 안 보겠느냐. 다만 검색 이력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알고리즘이 작동하지 않는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마음이 너무 편하다. 필요한 것만 검색해서 보면 된다.”
손석희는 알고리즘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에 종속되지 않는 방식으로 유튜브를 소비하고 싶다는 것이다. 기술을 부정하지 않되, 기술의 작동 원리를 통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축소하려 한 것일 수도 있겠다. 이 말에는 언론이 기술적 중개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리고 충분한가 하는 점이다. 검색 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알고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검색 결과 자체도 알고리즘으로 정렬된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소식, 조회수, 관련성 등에도 알고리즘은 끼어든다. 아울러 그가 '필요한 것'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이미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정보 환경의 장 안에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질문도 있다. 추천 알고리즘을 거부함으로써 대중이 무엇을 추천받고 소비하는지 민감하게 추적하기 힘들다는 문제도 있다.
언론인으로서 그는 대중의 정보 소비 패턴을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어떤 콘텐츠에 끌리고, 어떤 서사가 유통되며, 어떤 알고리즘의 편향이 작동하는지 민감하게 분석해야 한다. 오로지 검색만 사용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장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손석희의 선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알고리즘이 인간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는 마당에 그가 지키려는 것은 뉴스 소비의 주체성이다. 우린 알고리즘의 논리에 포섭되는 순간, 저널리즘은 클릭으로 변하고, 분석은 선동으로 변한다는 것을 숱하게 봐왔다.
손석희의 언론관은 오랜 시간 절제와 신뢰의 언어로 상징됐다. 사실 전달의 냉정함, 감정 절제, 언론의 품격을 중시하는 태도는 그를 상징한다. 그는 언제나 ‘정보의 정확성’과 ‘표현의 품위’ 사이의 균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방식은 ‘기술을 통제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물론 나는 그 믿음을 도덕적 이상주의가 아니라, 저널리즘의 판단력을 지키기 위한 ‘기술적 금욕주의’로 해석하지만.
한편, 김어준의 언론관은 손석희와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언론을 단순한 정보 전달의 장이 아니라 사회 개입의 도구로 본다. ‘뉴스공장’이라는 프로그램 타이틀은 그가 뉴스를 가공하고 재조립하는 행위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인다. 그의 뉴스는 언제나 ‘이야기’의 형태를 띤다. 사건의 사실 관계뿐 아니라, 그것이 발생한 맥락과 권력의 흐름을 함께 제시한다. 이러한 접근은 청취자에게 사실 관계를 넘어 설명과 해석을 제공한다.
동시에, 그의 방식은 ‘검증된 사실’보다 ‘해석의 일관성’을 우선하는 경향을 낳는다. 김어준은 “이 문제는 어떻게든 우리의 입장으로 해결해야 한다”라는 확신형 언론인의 전형이다. 그의 열정은 자주 진영의 확신으로 변하기도 한다. 언론이 사회적 감시자에서 참여자로 이동하는 순간, 사실은 해석의 종속물이 되기 쉽다. 이는 기존 언론의 관성에 균열을 내는 장점이 있지만, 공론장의 신뢰 구조를 불안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손석희와 김어준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언론의 신뢰를 지키려 한다. 전자는 언론의 도덕적 정결함을, 후자는 언론의 실천적 유효성을 중시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AI와 알고리즘이 재편한 공론장의 조건 속에서 불완전하다.
손석희의 절제는 기술 이해의 한계와 결합할 때 시공간적 단절을 낳고, 김어준의 개입은 감정의 정치학에 의존하며 신뢰의 피로를 증폭한다. 결국 두 사람의 강박은 ‘깨끗해야 한다’와 ‘해결해야 한다’라는 상반된 것이지만, ‘기술이 만든 공론장의 구조적 문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AI 시대의 뉴스 소비자는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다. 그들은 알고리즘의 공동 설계자이자, 데이터의 공급자다. 따라서 비판적 수용은 개인의 윤리이자 사회적 책임이다. “스스로 걸러 읽어라”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AI가 뉴스 노출의 기준을 정하고, 감정의 강도를 기반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현실에서, 개인의 분별력만으로는 공론장의 균형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손석희의 절제는 기술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인간 판단의 복원을 향한 시도로 읽히는 측면이 있지만 현실에서 시민들의 뉴스 소비 행태를 여과 없이 읽는데 제한이 있다. 김어준의 개입은 언론의 실천적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신뢰에 취약하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언론은 ‘기술을 이해하는 절제’, ‘윤리를 내장한 개입’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언론인이라면, 알고리즘을 외면하지도, 그대로 따르지도 말아야 한다. 조장도 회피도 적절한 답이 될 수 없다. 그 작동 원리를 해석하고, 그것이 인간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때, 언론은 기술 문명 속에서도 윤리적 주체로 남을 수 있다.
손석희의 신중함과 김어준의 열정은, 한국 언론이 스스로 역할을 다시 묻는 두 개의 거울이다. 한쪽은 도덕적 신중함 속에서 현실을 잃고, 다른 한쪽은 현실의 소음 속에서 균형을 잃는다. 그 사이 어딘가, 기술과 윤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언론은 다시 ‘사람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 이야기를 하자면 결국, 미디어를 소비, 생산, 유통하는 시민의 소양으로 귀결한다.
교과서 같은 이야기지만 ‘미디어 리터러시’는 개인의 실천을 넘어서는 사회적 합의의 영역이다. 교육은 기술의 원리를 가르치는 수준을 넘어, ‘정보의 구조’와 ‘플랫폼 권력’을 함께 다뤄야 한다. 공론장은 개인의 자유 위에서 시작되지만, 신뢰는 공동의 윤리로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