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가진 정동과 윤리적 판단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노력
마사 누스바움은 시민이 갖춰야 할 능력 가운데 하나로 ‘서사적 상상력(narrative imagination)을 강조했다. 서사적 상상력이란 특정한 삶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마주한 상황을 따라가 보고, 그 사람이 내릴 법한 결정을 온전히 체감하는 능력이다. 이는 타인을 추상적 개념으로 소비하지 않고, 구체적인 삶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서사적 상상력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고, 타인의 기쁨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게 하며, 민주주의의 정서적 기반을 이룬다.
AI 문해력의 핵심도 이와 다르지 않다. AI 시대의 시민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단순히 기술을 ‘쓸 줄 아는 능력’이 아니다. 기술이 개입하는 과정에서 어떤 경험이 변형되는지, 어떤 노동이 가려지는지, 어떤 윤리적 긴장이 발생하는지를 인식할 수 있는 감수성이다.
이는 곧 기술의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 선택이 사회 전체에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를 서사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는 능력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발달 단계에 맞게 AI를 조심스럽게 접해야 한다는 말은, 결국 기술적 숙련보다 ‘서사적 이해’를 먼저 세우자는 주장과 통한다.
AI는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내지만, 인간의 경험을 '몸'으로 겪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AI를 사용할 때 특정 대답이 어떤 데이터와 구조적 편향 위에 구성되는지 상상해보고, 그 대답이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왜곡할 위험은 없는지 검토해야 한다. 이 능력이 결여될 때 AI 문해력은 곧바로 기술 의존과 인지적 게으름으로 미끄러지며, 어린 세대일수록 ‘편리함의 중독’에 쉽게 노출된다.
결국 서사적 상상력과 AI 문해력은 같은 지점을 향해 있다. 둘 다 인간의 고유성 - 즉, 타인의 삶을 상상하고, 세계를 책임 있게 이해하며, 스스로 선택한 삶을 꾸려가는 능력 - 을 지켜내기 위한 기반이다. AI 문해력 교육은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인간의 자리, 인간만이 가진 정동과 윤리적 판단의 능력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누스바움이 말한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능력”은 이제 “AI가 개입한 세계에서 인간으로 남는 능력”으로 확장하고 있다. AI가 세계를 설명하는 시대, 우리는 오히려 더 깊이 ‘서사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