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담화

설거지하는 중년 남자

하루를 지탱하는 조용한 노동의 힘을 믿는다

by 교실밖


우리 집의 설거지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배우자와 특별한 약속을 한 적은 없지만, 오랜 시간 함께 살면서 식사 준비는 배우자가, 설거지는 내가 하는 자연스러운 분담이 만들어졌다. 물론 가끔은 역할이 바뀔 때도 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싱크대 앞에 서는 일은 이제 하루의 마침표와도 같다. 내 또래 남성들이 여전히 "도와준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알지만 내가 설거지를 ‘도움’이 아니라 ‘내 몫’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집이란 함께 사는 공간이고, 함께 유지해야 하는 세계니까 말이다.


식기세척기라는 문명의 이기를 마다하고 나는 여전히 손으로 설거지를 한다. 단순한 습관 때문만은 아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그릇에 닿는 수세미의 마찰음을 따라가다 보면, 별것 아닌 노동이 주는 감각적 충족이 나에게는 일종의 의식처럼 다가온다. 손이 그 순간의 감각을 선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나의 설거지 순서는 거의 변함이 없다. 먼저 남은 음식물을 싱크대 거름망에 모아 물로 깨끗이 헹군다. 헹궈낸 찌꺼기는 린클(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음식물 처리기-특정 상품 광고 아님)에 넣는다. 이때 나는 ‘화학적 무해성’이라는 작은 원칙을 지킨다. 미생물이 화학 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세제가 묻지 않은 음식물을 따로 분리하는 일. 가정의 작은 생태계를 지키는 일종의 예의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일’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는 아주 사소한 실천이다.


이 일은 때때로 오래전 장면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들이 어릴 적, 숟가락을 씻다가 문득 그 작은 입이 생각나 미소를 지었던 적이 있다. 하루 세 번 식탁 앞에 모여 앉던 그 시절의 온기는 그릇 특유의 냄새에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아가지만, 설거지할 때면 그때의 식탁이 손끝에서 머문다.


남은 음식물을 처리한 뒤, 적당량의 세제를 펌핑해 거품을 만든다. 따뜻한 물이 손에 닿는 순간, 밖에서 굳어 있던 긴장이 풀린다. 기름기가 남아 있던 그릇의 표면을 여러 번 닦아내며 접시의 결, 컵의 얇은 가장자리, 냄비의 거친 바닥을 손끝으로 온전히 감각한다. 프라이팬은 일차로 키친타월로 닦아낸 뒤 물을 부어 한 번 더 끓인다. 그러면 적은 양의 세제로도 기름기를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


온종일 언어의 더미를 붙잡고 문장을 만드는 일에 매달려 있던 나는 이 시간에야 비로소 내 몸이 현실의 사물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말하자면 설거지는 사유의 노동이 아니라 존재의 노동이다. 내 손으로 닦아낸 그릇들이 건조대에 가지런히 놓여 물기가 말라가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단순 명쾌한 성취감이 좋다. 주방의 불이 꺼지고 싱크대가 다시 빛을 되찾을 때쯤 생각한다. 인간 삶의 가치는 결국 크고 거창한 업적보다 이런 반복되는 작은 노동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손으로 느끼는 노동의 감각이 나를 세상과 이어주고, 가정과 연결하며, 내 안의 윤리적 경계를 다듬어준다.


중년의 나는 화려한 성취보다도 한 사람의 하루를 지탱하는 조용한 노동의 힘을 더 믿는다. 그릇의 물자국이 말라가듯, 오늘 하루도 마무리했다. 특별할 것 없는 평온한 일상의 반복이다.


_________


커버 이미지 https://www.reliant.co.uk/blog/is-it-cheaper-to-wash-dishes-or-run-the-dishwasher/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을, 르누아르와 세잔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