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프랑코 감독의 멜로 영화 '메모리'(Memory) 관람 후기
미셸 프랑코 감독의 멜로 영화 '메모리(Memory)'는 인간의 기억이 가진 양면성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에게 기억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근간이자 성장의 원천이지만, 때로는 극복해야 할 깊은 상흔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기억'이라는 주제를 절제된 미학으로 탐구하며 관객에게 다가선다.
영화의 시작은 뉴욕의 낡은 아파트에서 홀로 딸을 키우는 '실비아(제시카 채스테인 분)'의 일상이다. 카메라는 실비아의 일상을 담담하게 비춘다. 그녀의 낡은 현관문에 종류별로 서너 개가 걸린 잠금장치는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신과 딸을 격리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상징한다. 여기는 도시의 중심이면서도 세계의 변두리처럼 느껴지는 고독한 자의 공간이다.
여주인공 실비아는 과거의 어떤 일에서 비롯한 알코올 중독을 이겨내고 성인 돌봄 센터에서 일한다. 어린 시절 겪은 상처로 인해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녀에게 과거의 기억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결국 지우고 싶은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실비아는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반면,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그녀를 뒤쫓다 집 앞에 밤새 머문 '사울(피터 사스가드 분)'은 기억을 상실해가는 치매 환자이다. 그는 자신이 왜 실비아를 쫓았는지조차 잊어버렸지만, 사라져 가는 기억의 파편 속에서 어떻게든 존재의 의미를 붙잡으려는 인물이다. 상반된 운명을 가진 두 인간의 예사롭지 않은 첫 만남이 이 영확의 시작이다.
'메모리'는 기억 상실을 다루는 흔한 멜로 드라마의 상투적인 장면들을 영리하게 피해 간다. 이 영화에는 가슴을 치는 절절한 고백이나 화려한 애정 신, '모든 것을 잊어도 당신만은 기억하겠다'는 그렇고 그런 사랑의 맹세, 혹은 극적 반전은 없다. 대신, 서로의 존재를 담담하게 인정하고 상처를 치유해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과정을 묘사한다.
실비아가 과거의 고통으로 괴로워할 때, 사울은 그녀의 상처에 대해 묻거나 섣부른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키며 그녀를 안아주는 행위만으로 공감을 표한다. 기억을 잃어가기에 오히려 과거의 판단과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울의 순수한 수용은, 실비아가 그토록 갈망했으나 가족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무조건적 인정'이다. 격정 대신 여백을 택한 감독의 연출이 '참 멋지다'라고 여러 번 생각했다.
두 사람은 거창한 약속 없이도 일상을 공유하고, 소박한 행위를 통해 연약한 서로의 존재를 보듬으며 깊은 연대를 형성한다. 극적인 계기가 아닌, 일상 속의 작고 사소한 접촉과 인정에서 치유가 시작됨을 보여주는 잔잔하면서도 속깊은 이야기다.
배경 음악이 영화 미학의 완성도를 한껏 높였다. 나도 젊은 시절 푹 빠져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던 영국의 록 밴드 프로콜 해럼(Procol Harum)의 명곡 'A Whiter Shade of Pale'을 잔잔하게 넣는다. 몽환적 선율의 노래는 트라우마와 망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껴안고도 평온함을 잃지 않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완벽하게 섞인다. 음악은 영화의 절제된 연출에 감정의 깊이를 더하면서, 관객이 인물들의 고통과 치유에 보다 깊이 몰입하게 하는 매개이다.
'메모리'는 자극적인 서사 없이도 두 인물의 고독과 연대를 통해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상처와 회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기억의 굴레에 갇힌 사람과 기억에서 해방되어가는 사람이 만나 서로의 구원이 되는 이 역설적인 서사는, 타인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치유제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잊지 못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울까. 그 질문 너머 관계를 통한 구원은 찾아올까.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보았다.
프로콜 해럼(Procol Harum)의 'A Whiter Shade of Pale'
https://www.youtube.com/watch?v=z0vCwGUZe1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