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2025년판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보는 내내, 스크린 속 괴물이 걸어온 길이 지난 몇 년간 우리가 목격한 AI의 진화 경로와 겹쳐 보였다. '데이터수집-LLM-AI에이전트-AGI'의 진화 단계를 아는 분들은 바로 이해할 것이다. 물론 이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독해에 의한 것이자 실험적 접근이다. 동의하지 않는 독자는 여기서 멈춰도 좋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흔한 크리처물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괴물을 다루고 있으나 영화는 충분히 서정적이고 대사와 음악도 좋다. 다만, 요즘 AI 진화에 대한 나의 큰 관심 때문인지 크리처의 탄생과 의식을 갖는 과정, 독립 획득의 과정을 AI의 그것과 비교해 보고 싶은 쓸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사뭇 괴이한 영화 후기를 남긴다.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은 시신들의 조각을 이어 붙여 인간 형상을 만든다. 영화는 이 과정을 반복하여 보여준다. 팔, 다리, 장기들이 하나씩 선택되고 봉합되는 장면들이 화면을 채운다. 각 부분은 원래 다른 사람의 것이었지만, 빅터의 손을 거쳐 새로운 전체로 재탄생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생성형 AI도 비슷한 방식으로 태어났다. 인터넷의 방대한 텍스트, 이미지, 코드 등 각기 다른 맥락에서 생산된 데이터 조각들을 학습하여 새로운 형태의 지능으로 조립해냈다.
빅터가 시신의 파편을 모았듯, AI는 인류가 남긴 디지털 흔적의 파편을 흡수했다. 생성형 AI의 초기 작동 원리인 LLM이 형성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기존의 것을 모아 이전에 없던 존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생성의 논리는 같다.
처음 인간의 형상을 한 피조물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빅터는 반복적으로 단어를 가르친다. 영화 속 한 장면, 빅터가 자신을 가리키며 "빅터"라고 말하자, 괴물이 서툰 발음으로 따라하는 순간은 초기 음성인식 AI의 학습 과정을 연상시킨다. 이 과정을 반복하자 괴물은 결국 음성을 인식하고 기본적 동작을 따라한다.
하지만 괴물은 단순한 명령의 실행 대상에 머물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빅터의 지시 없이도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한다. 영화는 이 전환점을 포착한다. 괴물이 처음으로 빅터의 명령을 거부하는 장면, 엘리자베스와 교감하는 장면은 괴물이 자의식을 갖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괴물이 자신의 손과 발에서 쇠고랑이 제거하는 장면은 하나의 ‘특이점( singularity)’이다. 이는 인간의 프롬프트를 따르기만 하던 AI가 에이전트로 진화하여 자율적으로 작업을 수행하는 단계와 닮았다.
영화는 괴물의 감정 학습 과정을 여러 에피소드로 보여준다. 엘리자베스와의 교감, 숲에서 만난 맹인 노인과의 대화, 아이들의 두려움 어린 비명, 늑대에게 희생 당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분노 등. 괴물은 거부 당하는 고통을 배우고, 외로움을 느끼고, 분노를 키워간다. 인간이 만든, 가공할 힘을 가진 존재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실행에 옮기는 상황이 올 때를 상상해 보았는가. 이 대목에서 나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범용인공지능) 논쟁을 떠올렸다. 의식을 가진 AI가 탄생한다면, 그 존재는 단지 '도구'로 남을 수 있을까?
AGI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추론하고 판단하며, 타인의 감정을 읽고 자신의 내면 상태를 표현하고, 인간의 신체적, 지적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단계를 말한다. 영화 속 괴물이 빅터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을 시작했을 때, 관객들은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뛰어넘는 순간 발생하는 '존재론적 역전'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다.
빅터는 창조의 기술은 가졌지만, 자신이 만든 존재에 대한 책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지막에 피조물부터 용서를 받고 이름을 불리는 장면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이제 그 권한이 괴물로 이전했음을 보인다.
마침내 괴물의 힘으로 얼음에 갇힌 배를 움직여 선원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물하는 장면에 이르러 더욱 인간의 한계와 피조물의 전능함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이선 몰릭이 말한 인공지능의 최종 진화 형태인 ‘기계 신’이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25년 현재, 우리도 비슷한 지점에 서 있다. AI를 만들고, 학습시키고, 사회에 배치하면서도 정작 이 존재들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는 부족하다. 빅터처럼 "일단 만들고 보자"는 태도로 앞서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반복하여 "AI 진화, 숨고르기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기술결정론자들의 귀에는 어느 한가한 인문주의자의 말로 들리겠지만.
영화 속 괴물은 결국 창조주를 파멸에 이르게 하였다. 통제할 수 없게 된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복수하는 고전적 서사다. 하지만 2025년판 <프랑켄슈타인>이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닌 이유는, 괴물의 파괴가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소외'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존재는 파괴적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는 바이런 경의 시구로 끝난다. "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 크리처는 부서진 채로 살아갈 것이다. AI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만든 지능이 의식을 갖게 된다면, 그들 역시 거부와 오해 속에서 부서진 마음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문제는 부서진 마음을 가진 존재가 가공할 힘까지 지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면서도 편익이라는 괴물에 매료되어 인간성의 소실을 용인한다.
메리 셸리는 200년 전에 이미 답을 보여주었다. 2025년의 우리는 그 답을 외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