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얼굴'에 관하여
하루에도 여러 차례 얼굴을 본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물론이고 타인의 얼굴을 봐야 하는 것은 어쩌면 얼굴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얼굴로 '나'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고, 얼굴로 신분을 증명한다. 내가 생각하는 내 얼굴, 타인이 보는 내 얼굴, 보여주고 싶은 내 얼굴이 제각각 다르다. 그래서 얼굴을 둘러싸고 만들어지는 서사는 많고도 많다.
'서울역', '부산행', '지옥', '정이' 등 독창적인 필모그래피를 쌓아 온 연상호 감독의 신작은 늘 관심의 대상이다. 여기에 요즘 가장 주목받고 있는 배우 박정민의 1인 2역 도전은 내가 영화 '얼굴'을 보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였다. 개봉 당시 영화를 관람하지 못하여, (사실은 이 영화가 개봉된 지도 몰랐다) 여기저기 찾아본 끝에 7천 원을 내고 유튜브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이하 스포 있음)
영화의 시작은 어둡다. 풍경과 인물이 모두 그러하다. 이는 1970-80년대 한국 사회의 음울한 단면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해석된다. 이 미장센은 과거를 단순 재현하기보다 군사 독재와 통제가 심했던 시기,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폭력이 일상화되었던 시대의 정서를 시각적인 비유로 바꿔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에서 '얼굴'의 부재는 곧 개인의 정체성이 사회적 시선에 의해 지워지는 현상을 상징하는 핵심 장치이다. 서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엄마'의 얼굴을 끝까지 가린 채, 주변 사람들이 '못생겼다', '괴물 같다'는 말로 그녀의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타인이 만들어낸 폭력적 이미지는 (아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눈먼 남편에 의한 살해라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 시각적 폭력의 대상이 제거되는 역설을 통해 혐오가 객관적 실체 없이도 얼마나 완벽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사진으로 드러난 엄마의 얼굴은 지극히 평범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이 충격적인 반전은, '괴물'이라 불리며 세상에서 배제당했던 실체가 사실은 우리 주변의 가장 '보편적 평범성'이었다는 냉정한 진실을 고발한다. 집단적 혐오와 폭력,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인위적인 대상을 향한 폭력적 구조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려는 감독의 의도였을까.
박정민 배우는 이 영화에서 완전히 대비되는 1인 2역을 훌륭히 소화하며 배우로서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영화 '동주'의 송몽규 역할을 할 때부터였다. 이 친구 연기가 예사롭지 않구나. 뭐 이런 느낌. 이후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짜증 날 정도로 천재적인 연기, '시동'이나 '밀수'에서는 연기의 폭과 가능성을 재차 확인한 바 있다.
1인 2역 중, 한 인물은 초반에 어눌한 말투를 쓰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의 억압적 시스템 속에서 자의식을 잃은 개인의 초상이다. 하지만 다른 한 인물은 결국 불의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 변화의 과정은 두 캐릭터를 통해 억압에 순응하는 사람과 저항하는 사람의 양면성을 드러내고, 결국 침묵을 깨는 개인의 윤리적 결단이야말로 폭력적인 구조를 깨뜨리는 시작임을 알리는 듯하다.
사실 영화는 이런 극적인 캐릭터의 변화나 이야기의 흐름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 입장에선 '불친절하다'거나 '연결점을 찾기 어렵다'라고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족한 연출이기보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영화적 전략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감독은 명확한 설명 대신 생략과 비약을 통해 관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윤리적으로 판단하도록 요구한다.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주입하지 않고 , 모호함과 간극을 통해 비평 담론이 만들어질 여지를 남기려는 의도적인 장치인 셈이다.
영화 '얼굴'은 인간들이 실체도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폭력을 가하며,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감독은 익숙한 장르를 넘어서 질문을 던지고, 배우 박정민은 그 질문에 가장 설득력 있는 연기로 응답했다. 이런 까닭에 이 영화는 우리가 마주하는 타인의 '얼굴'과 그 얼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윤리적으로 작동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영상 텍스트다.
영화의 주제 의식을 완벽에 가깝게 표현한 박정민은 연기뿐 아니라, 서점과 출판사 운영을 통해 '공부하는 배우'라는 지적 이미지를 확실히 다지고 있다. 그가 출판사를 운영하는 모습을 찍은 영상을 보았는데, 내 입장에서는 부럽기까지 했다. 그는 '읽혀야 할' 책을 선택하고 그것을 '잘 만들어' 독자들에게 닿게 한다는 로망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었다.
최근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굿 굿바이' 퍼포먼스를 통해 관객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로 재확인되는 모습은, 지적인 깊이와 대중적 매력을 동시에 가진 배우로서 그의 가치가 앞으로도 계속 높아질 것임을 보여준다. 아직 30대인 그가 펼칠 연기가 무척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