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경쟁 속에서 교양이 사치로 취급되는 풍경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의 마지막 화를 보았다. 처음 제목만 보고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이라는 직장인의 로망이 듬뿍 담긴 키워드를 활용하여 어떤 드라마를 만들려고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화까지 다 보고 나니 이 드라마가 포착한 것은 단순히 대기업의 풍경이 아니라 현대인의 실존 그 자체였다는 생각이 든다.
김 부장은 이사가 되고 싶어 한다. 백 상무는 전무를 꿈꾼다. 도 부장은 이사 승진을 노린다. 직급은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한 계단 더’를 향해 치열하게 달린다. 이는 대기업만의 특수한 문화가 아닌 현대 조직사회를 관통하는 욕망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현실 고증을 떠나 시청자가 이 드라마에 몰입했던 것은 너와 나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오는 감정이입이었을 거다.
누구도 이 게임에서 자유롭지 않고, 게임 참여 자체가 곧 그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자신의 직급과 소속으로 답하지 않나. 우린 모두 어디에서 일하는지, 어떤 직급인지에 따라 내 인간을, 인격을 맞추어 살고 있다.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 이것은 한국 사회가 정의해 온 ‘성공’의 상징이다. 지방이 아닌 서울, 전세가 아닌 자가,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 사원이 아닌 부장. 이렇게 보면 김 부장은 사실 실패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이 공식의 대부분을 성취한 사람이다. 우리의 상식으로 부족할 것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김 부장을 보며 느낀 것은 부러움이 아니라 ‘짠함’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물론 배우의 연기도 한몫했다) 아마도 김 부장이 이미 가진 것들이 그를 안정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부장까지 올라왔으면 이제 좀 편할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이사’를 향해 달려야 했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의미를 잃을 것처럼 보였다. 성취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더 불안해지는 역설이다. 사는 게 참 힘들다. 그러니 짠하지.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아지고, 올라온 만큼 떨어질 높이도 높아진다. 우리가 김 부장을 보면서 느낀 ‘짠내’의 원천이다. 그는 성공했지만 성공이 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갑갑한 게임 속에 가두어 놓았다. 이사가, 부장이, 과장이, 대리가 사원이 제각각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 외에도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또는 게임장에서 밀려나지 않게 사투를 벌여야 하는 숙명적 삶.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 동년배들 사이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허세. 사실 그 허세는 약함이 아니라 생존 본능이다. 그래서 성취하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은 단순히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붕괴처럼 다가온다. “나는 이사도 못 되는 사람”이라는 자기규정 앞에서,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이 무색해진다.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잠시 쉬어갈 수도 없는 위치. 후배들에게 밀려서도 안 되는 그 자리. 성취가 곧 안정이 아니라 더 높은 긴장을 요구하는 구조다.
김 부장은 한때 이 게임 밖으로 나간다. 분양 사기를 당하고, 육체노동 현장에서 땀을 흘린다. 회사 밖 세계에서 그는 더 이상 부장이 아니었다. 명함도, 직함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그는 그냥 ‘일하는’ 사람이었다. 땀 흘리며 몸을 쓰는 그 시간이 그에게 무엇을 보여주었을까.
드라마는 그 답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 경험 이후 김 부장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 그것 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몸을 통과한 노동을 한 후에야 김 부장이 삶의 의미를 터득했다'라고 보는 시각도 섣부르다. 평온을 얻은 시간도 잠시일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드라마는 ‘능력중심사회’라는 신화의 이면도 보여준다. 승진이 오직 능력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사내정치, 줄 서기, 눈치 보기, 파벌. 실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메커니즘들이 작동한다. 누군가는 실력이 있어도 밀려나고, 누군가는 정치력으로 살아남는다.
공정하다고 믿었던 게임이 실은 보이지 않는 규칙들로 가득하다는 것. 그 자각 앞에서 좌절은 더 깊어진다. 젊은이들과 토론할 때 ‘공정하기만 하다면 차별은 정당하다’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들었다. 공정은 형성된 외형이고, 실제 내용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한 ‘정치질’이다.
드라마는 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회사를 떠난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남아서 승진한 사람이 완전한 승리자처럼 그려지지도 않는다.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안에 남아 이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자기 선택의 의미를 어떻게 감당하느냐, 그것이 남는다.
‘직장 안에 있는 만큼은’ 이 게임의 규칙은 절대적이다. 게임을 거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참여하는 순간, 그 치열한 생존 게임을 피할 수는 없다. 승진은 더 이상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도태되지 않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직급을 새긴 명함 뒤에 숨은 민낯을 직면하는 일. 그러면서도 다시 그 게임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더도 덜도 아닌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니 몇 가지 질문이 남는다. 서울-자가-대기업-부장으로 완성되는 그 공식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아니, 어쩌면 그 공식을 이루었기 때문에 더 불행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공식을 위해 우리가 포기한 것은 무엇인가. 승진 게임에서 이기는 것과 삶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같은 일인가. 상투적인 질문이 아니라 정말 궁금하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시스템은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시키고, 선발과 낙오가 일상이 되는 현실에서 사실 행복이란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대기업이 아닌 공무원들은 어떨까. 나 역시 10년 동안 중앙부처와 교육청을 오가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났다. 승진을 둘러싼 민낯의 욕망도 꽤 보았고, 조직에서 요구하는 인간으로 변모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도 만났다. 숨 막히는 경쟁 속에서 교양은 사치로 취급되는 풍경도 경험했다.
공직 생활 동안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공무원 생리학’이란 책을 여러 번 떠올렸다. 200년 전 프랑스 공무원 사회와 오늘 한국의 공무원 사회도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건 참 쓸쓸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