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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Oct 28. 2024

소라의 겨울(4)

여러 명의 어른들이 나를 둘러싸고 알아듣기 힘든 말을 했어

 -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어. 창밖이 어두워졌어. 누군가 나 있는 곳으로 다가왔어. 나보다 두어 살은 많아 보이는 여자가 내 옆에 와서 앉았어. 나도 일어나 앉았어. 그 여자는 나에게 말을 걸었어.

  "어제도 봤는데, 여기 자주 오네요?"

  "아, 네..."

  "저녁 먹을 땐데 여기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갈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어. 난 따라갔어. 찜질방 구석에 있는 식당엔 미역국, 해장국, 갈비탕 같은 메뉴가 있었어. 그녀가 먼저 메뉴를 선택했어. "난 미역국 먹을 건데, 뭐 먹을래요? 음식값은 걱정 마요. 이게 있으니까." 그녀가 왼쪽 손목을 들어 보였어. 찜질방에서 계산할 때 쓰는 팔찌를 차고 있었어. 난 기운이 없어 "저도요..."라고 겨우 말했어. 미역국은 따뜻했고 맛이 있었어. 그녀가 "남기지 말고 다 먹어요."라고 말했어. 그 순간 지영이 네 생각이 났어. 그 언니의 이름은 윤정미라고 했어. 그냥 언니라고 부르래. 나도 내 이름을 말했어. "예쁜 이름이네..." 식사가 끝나자 우린 매점으로 가서 식혜를 먹었어.

  이 와중에 밥도 맛있고, 식혜의 시원한 맛이라니. 그 언니는 꼬치꼬치 묻지 않았지만 뭔가 거짓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나를 압도하는 힘 같은 게 느껴졌어. 나는 외삼촌 이야기만 빼고 거의 다 말했어. 빚에 시달리던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고, 엄마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며, 난 외할머니댁에 있다가 지금은 나왔고, 학교는 결석 중이라고 말했어. 정미 언니는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어. 그저 말하는 나를 보며 가끔 고개를 끄덕였는데 정말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생각해도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나에게서 이토록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정미 언니가 물었어. "모르겠어요. 집 나온 지 이틀 동안은 할머니가 찾았는데 이젠 연락 안 요. 엄마하고 나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셨거든요. 찾지 않을지도 몰라요. 다시 그 집으로 가긴 싫고...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요." 여기까지 말하는 데 눈물이 솟구쳤어. 정미 언니는 내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어. 그 품이 넉넉하고 손길이 따뜻해서 난 더 울었어. 마치도 어린 시절 엄마 품 같았어. 정미 언니는 "갈 곳이 없으면 우리 집으로 갈래요?"라고 물었어. 나도 사실은 이 언니를 따라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이었거든. "그래도 돼요?"라고 내가 묻자 "그럼요. 걱정하지 말아요."라고 웃으며 말했어.


  내가 정미 언니를 따라 들어간 곳은 아파트였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내렸어. 정미 언니는 익숙하게 현관문에 달린 디지털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렀어. 문이 열리고 실내로 들어섰을 때 내 또래의 아이들이 현관으로 나와 정미 언니에게 인사를 했어. 여자 애들, 남자 애들이 같이 생활하는 곳이었어. "자, 새 식구가 왔어. 인사들 해." 정미 언니가 말하자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며 "난 정혜야." "반가워 나는 은정이라고 해." "난 명수..."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자기 이름을 대고 인사를 했어. "저는... 음... 강소라라고 하는데요." 나도 내 이름을 말했어. 이곳은 한눈에 봐도 집을 나온 아이들이 모여사는 곳이었어. 내 머릿속에 있는 '가출팸'은 집 나온 아이들 여럿이 모여 혼숙을 하는 탈선의 장소였어. 그런데 이곳은 그런 느낌이 없었어. 어른들만 없을 뿐이지 일반 가정집과 다를 바가 없었어.

  정갈하게 정돈된 거실, 깨끗한 주방, 그리고 세 개의 방이 있었어. 정미 언니가 설명했어. "안방에는 여자아이들 세 명이 있는데, 이제 넷이 됐네? 그리고 남자아이들은 저쪽 방에 세 명이 있고... 음.. 그리고 저긴 내 방이야" 정미 언니는 손가락으로 각 방을 가리키며 "네 명이 지내려면 좁으려나? 그럼 나하고 지내든지..." 그러자 여자 아이들이 일제히 말했어. "아뇨, 우리랑 같이 지낼 거예요. 그렇지?"라고 말하면서 내 팔을 잡아끌었어. 나는 정미 언니를 바라보며 못 이기는 척 이끌려 들어갔어.

  안방은 정돈이 잘 되어 있었어. 중간 크기 침대가 두 개 있었어. "정해진 자린 없지만 한 침대에서 두 명씩 자면 돼."라고 은정이가 말했어. 그리고 "학교는?"이라고 물어 왔어. 나는 지금 결석 중이라고 말했어. "피곤하지? 열두 시에 점심을 먹으니까 좀 잘래?" 정혜라고 자기를 소개한 아이가 말했어. 지금 열 시니까 열두 시가 되려면 두 시간 여유가 있었어. 아이들은 방을 내주고 다시 거실로 나갔어.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천장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누워 잠이 들었어.

  꿈을 꾸었어. 여러 명의 어른들이 나를 둘러싸고 알아듣기 힘든 말을 했어. 엄마와 아빠 얼굴이 지나가고 선생님들, 할머니와 외삼촌의 얼굴이 보였어. 외삼촌이 '소라야 죽을죄를 졌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테니 집으로 돌아와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그리고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사라졌어. 담임의 얼굴이 보이면서 '내일 학교에 올 때 약봉지 챙겨 와라, 약봉지...'라고 말하고는 '괜찮아 결석해도. 약봉지만 챙겨 오면 무단결석이 아니니까. 그러나 약봉지 없이 결석이 길어지면 졸업을 못할 수 있단다. 중요한 사항이니 안내해 주는 거야.'라고 말했다. 꿈속에서도 또렷한 담임의 목소리였다.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의사는 '뭐 상처도 없고 큰 문제없어요.'라고 말하는 듯하더니 경력이 있어 보이는 여자 경찰은 '아, 그렇군요. 쉽지 않겠네요. 왜 바로 목욕을 했나요? 속옷도 빨면 안 되는데...' 하면서 나를 나무랐어. 나는 '어른들은 다 지옥 같아요.'라고 말했어. 그러나 말은 밖으로 나가지 못했어. 나 혼자 중얼거릴 뿐이었어.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니 점심 먹을 때가 됐어. 주방 앞의 식탁은 두 개를 길게 붙여 놓아서 열 명이 앉아도 될 만큼 넓었어. 중학생은 나 혼자인 듯했어. 한 명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다고 했고, 나머지는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가출해서 이곳으로 왔다고 말해줬어. 그러니까 여기선 내가 막내였던 셈이야. 정미 언니는 더 이상 무엇을 묻지도 않았고, 나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었어. "여긴 식사 준비, 설거지, 청소, 세탁 당번이 있어. 일주일마다 한 번씩 바꾸지. 소라는 며칠 쉬다가 한 가지 맡아서 하자." 나는 "네..."라고 답했어. 밥과 반찬이 식탁 위에 차려지기 시작했어.

  잡곡밥과 김치, 계란부침, 두부와 콩자반, 생선 구이, 큰 접시에 담긴 샐러드가 있었어. 아이들끼리 생활하는 데도 식단은 엄마가 차려준 듯했어. 점심은 맛이 있었어. 오랜만에 공깃밥 하나를 다 비우고 반찬도 많이 먹었어. 처음 와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것저것 많이 먹었어. 모두들 나를 보고 말했어. "잘 먹어야 해. 음식은 남김없이... 그래야 설거지가 편하지." 약속한 듯이 합창을 하고는 모두 깔깔거리고 웃었어. "정미 언니가 늘 하는 말이거든. 정미 언니는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밥만 잘 먹으면 이뻐해 준다?" 정미 언니가 나를 보고 웃었어.

  며칠이 지났어. 당번 면제 기간도 끝났어. 그 사이에 아이들도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었고, 정미 언니도 내가 빨리 적응하도록 도와주었어. 내가 상상하던 가출팸과는 완전히 달랐어. 여긴 정미 언니를 중심으로 일곱 명의 아이들이 있고, 스스로 정한 규칙이 있었어. 외출은 자유로웠지만 밤 열두 시까진 들어와야 했고, 밥과 반찬은 딱 먹을 만큼만 준비해서 그릇을 완전히 비워야지 식사가 끝난다는 것, 세탁물은 세탁 바구니에 넣고 당번이 세탁과 건조를 한 다음 거실에 놓으면 알아서 자기 것은 가져가는 거야. 서로 의견이 엇갈리면 정미 언니를 찾아서 중재를 요청했어. 정미 언니는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판단을 내려주거나 정리가 어려울 땐 모두들 모이게 해서 의견을 나누게 했어.

  대부분의 아이들은 편의점이나 배달 알바를 했어. 한 달에 일인당 30만 원을 생활비로 냈어. 그것으로 집세도 내고 여덟 명의 생활비로 썼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을 거야. 나는 공짜로 먹고 잤으니까. 정미 언니가 아이들이 다 모아서 낸 만큼 따로 부담을 하는 것 같았어. 한 달에 200만 원도 더 됐을 거야. 아이들은 미안하게 생각했고, 정미 언니는 입버릇처럼 "미안하면 밥 먹어. 남김없이..."라고 말했어. 생활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나니 난 이곳이 편해졌어. 나는 알바를 하지 않으니까 청소나 세탁을 도맡아서 하겠다고 자청했어. 그러나 아이들은 그럴 수 없다면서 규칙대로 하자고 말했어. 내년부터는 나도 알바를 하면 된다고 했어. 정미 언니는 아침 먹고 알바를 나가서 저녁 전에 들어왔어. 점심 때는 남아 있는 아이들끼리 밥을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었어.

  정미 언니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았어. 열여덟 살이었지. 학교를 계속 다녔으면 고3이었을 거야. 내가 만난 어떤 어른보다도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이해했어. 큰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문제가 있으면 아이들을 모이게 해서 이야기를 나눈 다음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결정하도록 도와주었어. 언니는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아는 것도 많았어. 언니 방에는 책이 많았거든. 나는 마음속으로 정미 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을 정리했어. 정말 궁금한 것이 많았어.


  아이들에게 듣기도 하고, 정미 언니도 가끔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결정적인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어. 왜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인지, 이런 형태의 가출팸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밖에서 누굴 만나고 다니는 지와 같은 질문거리들이 생겼어. 하지만 꼭 물어봐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어. 언젠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들으면 되니까. 여기 아이들 모두 그런 것 같았어.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안 한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귀가 시간이나 공동으로 지켜야 할 규칙 외에 나머지 사생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보장한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을 땐 게시판에 내용과 시간을 적어서 제안한다. 생활하면서 보니 모두들 이 방법에 익숙한 것 같았어. 나는 이곳 생활을 편하게 느끼기 시작했어.


  나는 정미 언니가 좋았어. 언니가 진지하게 말할 때, 웃을 때, 따뜻하게 안아줄 때, 말을 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볼 때도 난 언니가 너무 좋았어. 초겨울 어느 날 나는 정미 언니에게 외삼촌 이야기를 했어. 언니는 이야기를 다 듣고 함께 울어주었어. 그리고 나를 꼭 안아주었어. 등을 토닥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괜찮아. 다 좋아질 거야. 아이들에게는 네가 말하고 싶을 때 해. 안 해도 상관은 없어."라고 말했어. 난 언니와 오래 함께 있고 싶었어. 지영이 너 말고는 내가 만나본 그 누구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미 언니는 마치 나를 오랫동안 지켜봐 온 것처럼 대해줬어.


  남자아이들도 언니 말이라면 잘 들었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도 정미 언니가 정리를 해주면 군말 없이 받아들였어. 언니는 남자아이들에게 늘 오토바이 탈 때 조심하라고 당부했어. 명수는 언젠가 "누나 우리 집 애들만 모범적으로 오토바이를 타요. 배달하는 다른 애들이 우리 보고 아저씨냐고 해요. 근데 사고 나면 나만 손해니까 곡예운전은 안 하는 게 좋긴 하죠."라고 말하며 웃었어. 언니는 고1 때 자퇴를 했다는데, 이곳에선 작년부터 생활했으니까 대략 일 년 반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없었거든. 누구도 묻지 않았어. 언젠가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가 있다고 믿었거든. 언니도 우리의 사생활을 지켜주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


  이곳 생활은 평화로왔어. 경찰서에서 두어 번 전화가 왔어. 외삼촌 이야기를 하길래 "내가 꼭 들어야 하나요? 그냥 어른들끼리 처리하세요. 앞으론 전화를 안 받을 게요."라고 말했어. 상담소에서도 한 번 더 문자가 왔는데 그냥 '읽씹'했어. 난 지금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았거든. 어른이 없어도, 아이들끼리만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어. 모두들 자기 집보다 이곳이 좋다고 했어. 남자아이들은 '정미 누나는 어른이 되면 안 돼요. 여기서 오래 같이 살아요.'라고 말했어. 나만 정미 언니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어. 아마 정미 언니는 아이들 때문에도 여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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