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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Jan 16. 2017

츤데레 사장님의 속 썩이는 고양이

제주 펜션 '웨스티하우스'에서 

하늘이 뿌옇게 흐린 날, 가끔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도 제주도를 여행하는 데에는 시처럼 운치를 더해주는 듯하다. 하지만 역시 날이 좋은 날, 그런 날 제주도의 오름과 하늘은 가장 아름답다. 


여행 중 매 하루를 마무리하는 숙소를 나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감성 코드가 비슷한 게스트하우스든, 현대식의 깨끗하고 편리한 펜션이든, 만족스러운 저녁 시간을 보내야 여행에 임하는 마음도 느긋해진다. 제주도의 펜션 웨스티하우스는 나의 취향에 이래저래 들어맞는 곳이었다. 여기에 도착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 푸르고 알록달록한 정원에 눈길이 한참 머물게 된다. 독채로 세워진 통나무집은 그 잘 꾸며진 정원을 따라 쏙쏙 토끼집처럼 숨어 있다. 



제주도에서 살아보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실제로 제주도에서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되는 이들 모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이 바로 나무와 화초 관리라고 한다. 웨스티하우스에서 각 품종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귤과 귤 사촌(?)들을 관리하는 데 얼마나 공을 들일지 짐작이 갔다. 


열쇠를 받으려고 사장님 내외가 계신 독채 앞에서 인기척을 내다가, 신발장에 놓인 상자에 하얀 털 뭉치가 담긴 걸 보고 신랑은 ‘백구다!’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그 상자 속에 담긴 뭉치가 꾸물꾸물 움직이며 고개를 반짝 들었다. 좀 꼬질꼬질하지만 하얀 고양이였다. 백구가 아니라 고양이잖아, 라고 웃으니 사장님이 나오면서 고양이를 번쩍 들어 정원의 돌 위에 올리시곤 얘가 모델 같다며 무심한 척 고양이 자랑을 하셨다. 


한참 어르신들, 사실상 아저씨들이 고양이를 귀여워하는 걸 보면 (이런 말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참 귀엽다. 대놓고 물고 빨고 하는 게 아니라 툭툭 뱉는 말투로 은근히 예뻐하시는 게 느껴지니 아무렴요, 고양이는 참 예쁘죠, 우린 같은 애묘인이네요, 하는 반가운 동질감이 샘솟는다. 뜻밖의 공통분모를 발견하는 셈이다.  


고양이 이름은 깜찍하게도 키티라고 했다. 키티는 목에 방울을 달고 그 넓은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사장님이 부르면 조르르 달려가는 모양이었다. 말은 안 해도 둘 사이의 애정과 신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 후에 반 년 정도 지나서 다시 제주도에 갔다. 한 번 갔던 숙소에 좀처럼 다시 가지 않는 편인데, 처음 갔던 기억이 참 좋아서 웨스티하우스에 다시 들렀다. 고양이는 물론 있었다. 그런데 예전보다 많이 마르고 어딘가 아픈 것처럼 보였다. 사장님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얘가 하루는 밥 먹으라고 아무리 불러도 안 오는 거예요. 며칠 동안 안 보이는 거야. 누가 잡아갔나, 했는데 알고 보니까 덫 같은 데 잘못 걸려서 목에서 피가 철철 나서 돌아온 걸 병원 달려가서 겨우 살렸지 뭐예요.” 


사장님이 고양이가 미운 듯 쳐다봤다. 목덜미를 헤집으니 목에 아직도 손가락 한 마디만큼 털이 나지 않은 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흰 고양이는 자기가 집사의 심장을 덜컥 내려놓은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비큐 자리 옆에 와서 언제 고기 한 조각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방안에도 서슴없이 들어오는 이 붙임성 좋은 고양이가 얼마 전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무사해서,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


사장님은 속을 단단히 썩인 녀석을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키티야, 라고 이름도 부르지도 않고 바보라고, 단어가 집히는 대로 대충 불렀다. 그러면서도 바비큐가 끝날 때까지 사장님 방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고양이를 확인하러 몇 번이나 왔다 갔다 눈도장을 찍고 가시는 것이었다. 


고양이는 우리의 저녁 식사가 다 끝날 즈음에야 방으로 돌아갔고, 다음 날 우리가 떠날 때도 느긋하게 해먹에 앉아 되돌아온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 웨스티하우스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포토타임을 선사해주는 것도 여전했다. 



어떤 여행에서 그곳의 동물들이 그 장소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줄 때가 있다. 내 반려동물도 아닌데,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지 별 일은 없는지 안부가 궁금해져 그곳을 다시 찾기도 한다. 건물의 모양과 여행지의 공기를 추억으로 다듬어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내게는 동물과의 교감이 그 추억의 색깔을 인상적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인 것 같다.


사고는 당했지만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온 웨스티하우스의 고양이를 만나, 오늘 하루 별 일 없는 것이 감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나무 집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볕에, 원하는 곳으로 떠나올 수 있었던 것에, 이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이곳에서 만난 기억 속의 흰 고양이가 여전히 백구인지 헷갈리는 비주얼로 손님들을 맞아주는 것에 일일이 조금씩 기뻐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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