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고등학교에서 『엔트로피』로 책모임을 했다.
엔트로피는 '변화', '전환'을 뜻하는 그리스어인데 열역학에서 에너지가 변환되면서 발생하는 무질서도, 혹은 에너지의 분산을 의미한다. 낯선 용어라 괜히 어렵게 느껴지지만 물리 성적이 좋지 않았던 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휘발유를 넣으면 자동차가 움직인다.
휘발유가 갖고 있던 에너지는 자동차가 나가는 힘, 이때 발생하는 열, 배기가스로 변환된다.
휘발유의 원 에너지 값과 자동차 나가는 힘+열+배기가스의 에너지 총량은 같다.
열역학 제1법칙이다. 쉽다.
이제 엔트로피가 등장할 차례!
휘발유의 에너지값과 자동차가 나가는 힘으로 변환된 뒤의 여러 에너지 총합의 양은 같지만 성질은 달라진다. 다시 말해 자동차 엔진이 받는 힘은 우리에게 유용하지만, 이때 발생한 열이나 배기가스는 우리에게 유용하지 않다. 휘발유 자체가 갖고 있던 질서도는 전환되어, 일부 유용한 질서 있는 에너지 + 무용한, 질서 없는 에너지로 변환되는 것이 열역학 제2법칙 = 엔트로피 법칙이다.
다시 말하면, 에너지가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될 때 언제나 엔트로피의 총량은 증가한다는 뜻이다.
책모임 이긴 하지만 모두 책을 읽고 오지는 못할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몇 해 전 처음 고등학교에 갔을 때 '아무도 읽어오지 않은 독서 동아리의 독서모임'이라 무척 놀랬었는데 이젠 나도 짠밥 좀 생겼다.
'당연히' 아무도 읽지 못했을 거라 예상하고 모임 준비를 했다.
엔트로피 개념과 열역학 제2법칙만 알아가도 훌륭하고, 이걸 바탕으로 내 삶과 세계를 연결 짓고 확장시킬 수만 있으면 성공이다. 차근차근 같이 읽어나가면서, 정리하면 된다. 모임 목표였다.
워밍업 논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일상을 경험한 적 있나요?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워지는 '내 방'은 기본이다. 엔트로피 증가! 다른 에너지가 투입되기 전까지는 점점 더 어지러워진다(실생활에서의 다른 에너지는 주로 부모님의 에너지인 경우가 많았다).
"얘 얼굴요! 갈수록 무질서해져요!"
독서모임은 포틀럭 파티와 같은데, 초라한 음식이나 맛없는 음식 가져오는 건 괜찮지만 상한 음식이나 독이 든 음식은 가져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초반에 했었다. '얼굴 평가'는 대표적인 위험한 음식! 삐~ 키득거리며 시작하지만 얼굴 공격을 받은 학생 기분은 쉽게 짐작된다. 장난이어도 재미없고, 장난이 아니면 더 기분 나쁘다. 할 이유가 전혀 없는 말! 다행히 알아듣고 금방 태세를 바꾼다. 웃으면 안 되는데 그래도 웃는 게 문제. 나부터 그렇다. 상한 음식, 권하지도 먹지도 맙시다!
제레미 리프킨의 나이와 유명한 저서부터 확인했다. 1945년생.
『엔트로피』는 1970년대 후반에 쓰였고, 아직까지 잘 팔리는 책이다. 약 50년이 지난 지금도 제레미 리프킨의 주장이 유효하다는 뜻이다. 모임 준비하면서 책에서 그가 예상했던 2000년대와 현재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예를 들어 인구 십만 명 이상의 도시에 사는 인구수라든가(현재 지구 인구는 80억 명 정도, 이 중 인구 십만 명 이상의 도시 거주자는 45억 명) 엔트로피 증가가 경제, 농업, 수송, 군대, 교육 같은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칠 거라는 예측(인플레이션이나 단일 경작으로 인한 비용 문제 등)이 거의 다 들어맞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억지스러운 면도 있어 보인다는 학생의 지적도 있었다. 과도한 컴퓨터 사용 및 정보 과부하를 저자는 문제로 생각했는데 '필요 없는 정보'라는 게 있냐는 게 한 학생의 질문이었다. 그 정보를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 몰라서 '정보 과부하'로 표현되지만 언젠가는 쓸모 있는 정보로의 변환도 가능하다고.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크게 크게 정리해 둔 표가 그렇게 읽혔을 수도, 나중에 다시 책을 읽더라도 저자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라 동의하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
세계관에 대한 토론도 인상적이었다.
세계관 설명은 필수였는데, 현대적 세계관(역사는 일직선의 형태로 늘 직진, 진보한다는 입장)을 바탕으로 세워진 기계론적 세계관. 이 세계관에서 벗어나 엔트로피 세계관을 갖지 않으면 우리 모두 지구라는 이 '폐쇄계'에서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엔트로피 세계관'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기 때문이다. 동의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동의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제레미의 설명에 따르면, '엔트로피 세계관'을 여전히 거부하는 이들은 낙관주의자(새로운 기술이 생길 거야. 엔트로피 법칙을 뒤집어엎을 수도 있는! 기술이 최고!), 실용주의자(엔트로피 법칙 알긴 알겠어. 그래도 기술은 진보해야지?), 향락주의자(아 몰라! 그냥 살래. 후손들이 나한테 뭐해준다고? 원래 인간은 탐욕스러운 존재야!)로 나뉘는데 이런 관점이 학생들에게서도 그대로 보였다. '돈이 최고' 세계관을 가진 학생도, '행복이 목적'이라는 세계관을 가진 학생도 있었다. 왜 이런 세계관을 갖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설명하는 학생들. 이해했고 동의했다. 걱정과 불안도 세계관을 갖게 할 수 있으니까. '돈이 최고 세계관'의 이면이 그대로 드러난다. 모두 끄덕끄덕. 나도 열심히.
폐쇄계와 개방계를 설명하는 챕터도 재밌었다. 책은 우리가 개방계라고 생각했던 이 지구가 실은 폐쇄계이므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양이 얼마 남지 않았다를 설명한다. 폐쇄계는 객체 사이의 물질교환은 이루어지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에너지가 전혀 없는 세상을 말한다. 개방계는 외부 에너지가 유입되는 세계. 생명체는 개방계이고, 개방계의 특징은 엔트로피 감소다. 생물의 성장은 질서도가 높아지는 저 엔트로피 상황이다. 하지만 각각의 개방계를, 즉 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는 에너지가 쓰이고 이 에너지 흐름은 당연히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이다. 예외는 없다.
외부에서 에너지가 들어올 수 없는 폐쇄계 - 내겐 게임 세계 같은 것이다. 옆에서 누가 어떻게 알려줘도 잘 못 알아듣는다. 객체 사이의 물질교환부터도 불가한 상황이랄까.
"여자요! 얜 여자들이랑 말도 한마디도 못 하고요. 어쨌든 여자들과 어떤 에너지 교환도 못해요."
"아씨. 아냐~"
"뭐 아니냐."
여자-폐쇄계 문제로 1조가 한참 웃는다.
"여러분이 일상에서 적용할 수 있는 저 엔트로피 생활은 무엇일까요?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저 엔트로피 행동을 위해 성인들이 해야 할 역할도 알려주세요"라는 질문에
"성인들도, 우리들도 할 일은 없다. 어차피 세상은 망해갈 거고, 태양 에너지가 고갈되면 지구에는 아무 생명체가 살 수 없다. 그게 몇십억 년 후든, 좀 더 당겨지든 큰 의미 없다"
"저 엔트로피 행동을 하는 사람도, 이걸 고민하는 사람도 한 명도 못 봤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저 친구의 말에 동의한다"라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럴까? 이 대화에서 난 오히려 성인들의 역할을 봤다. 이들의 부모 세대인 딱 내 또래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어떤 행동을 해 왔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부끄럽게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우리가 보여준 게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른다. 인식부터 커다란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되는 어떤 날이 오겠지 생각하며 무겁게 들었다. 지금 청소년들은 우리가 그 또래였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많이 고민하는 중이라는 걸 안다. 우리가 안 했던 몫까지 몇 배로 더. 역시 엔트로피 증가네....
세상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곳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책도 많다. 대표적인 책이 2018년도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팩트풀니스』, 데이터를 기반으로 폭력 감소, 전쟁 감소, 기아 사망자 수 감소를 보여주며 우리가 갖고 있던 '부정 본능'때문에 '팩트'를 보지 못하고, 세상은 망해간다고 믿고 있는 대중을 각성시키는 책이다. 스티븐 핑커의 책들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에게 있는 선한 본성이 세상을 살리고 있으며 이것은 데이터가 증명한다. (얼마 전 유퀴즈에 출현한 빌 게이츠가 꼽은 책 세 권 중 두 권이 여기 포함됐었다. 진행했던 책모임은 2024년도)
이 책들을 다시 뒤집는 책도 있다. 『핑커 씨, 사실인가요?』 우리나라 대학생이 쓴 책이다. 『팩트풀니스』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의 저자인 로슬링과 핑커에게 건네는 말이다. 당신들이 데려온 그 데이터는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가? 전쟁 수는 줄었다는 데이터 자체는 사실이다. 하지만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전쟁 건수는 왜 얘기하지 않는가? 데이터의 '팩트'만 확인할 게 아니라, 그 팩트의 맥락과 가치, 범위를 묻는 책!
드디어 마지막 소감.
엔트로피 개념을 알게 되어 좋았다. 몰랐던 법칙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물리학의 용어가 아니라 삶과 사회와도 연결 지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라는 소감이 이어지던 중 모임 내내 비교적 조용했던 한 학생이 말했다.
"저 엔트로피 생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어요." 딱히 의지에 찬 눈도, 큰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게 오롯이 전달됐다.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모르게 목멘 소리가 나올까 봐 헛기침을 해야 했다.
"행복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요. 이게 나의 세계관인데 이 세계관과 오늘 나눈 이야기를 연결해 봐야겠어요."라고 말한 학생도 있었다. 신재생 에너지에 관심이 많고 이것이 해결책이라 생각해 왔다는 학생도 있었다. 책에는 신재생 에너지의 한계도 한 챕터에 걸쳐 설명된다. 이 책을 읽었으니 '신재생 에너지'에 대한 관심을 거두라가 책모임의 결론이 아니다. 엔트로피를 고민하는 사람이 고민하는 '신재생 에너지'는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신재생 에너지'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기술적인 면은 모르겠다.
저 엔트로피 생활을 고민하는 사람도, 실천하는 사람도 전혀 보지 못했다는 학생들과 모두 한 반에서 나눈 얘기다. 저 엔트로피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 졌다는 학생은 훌륭하고, 그렇지 않은 학생도 있었고, 신재생 에너지에 관심 있는 학생은 인상적이었다가 전부가 아니다. 엔트로피를 처음 알게 된 사람, 개념을 확장시킨 사람, 내 생활과 이어 본 사람. 이 모두가 함께 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고, 이들이 이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이 전부다.
언제나 아름답다.
책을 읽기 전의 나, 책모임을 하기 전의 나는 이후의 나와 다르다. 내 생각이 변함없고,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영원할 것 같아도, 이런 모임이 반복되면 어떻게든 영향을 받는다. 공부를 하게 되고, 실천을 고민하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희망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은 채 저 엔트로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다른 형태가 책모임이라고 나는 믿는다.
오늘 치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서 글 쓴다.
모임에서 소개한 책은 다음과 같다.
엔트로피와 다른 주장을 하는 책
엔트로피와 궤를 같이 하는 책은 다음과 같다.
『침묵의 봄』을 함께 읽었던 친구들 생각이 많이 나던 하루였다. 책 친구들 덕분에 조금씩 자랐다.
오늘 치 사랑도 친구들에게서 시작된 것!
'호프 자런'의 책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의 '나'에는 '나'도 포함이다.
나는 풍요로웠고(내 엔트로피 감소) 지구는 달라졌다(지구 전체 엔트로피 증가)로도 읽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