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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사람, 배우는 사람

by 조달리


일하는 일요일.

도서관까지 거리가 좀 되어서 어김없이 라디오를 켰다.


11시쯤에 운전을 시작하면 딱 좋은 이유가 영화음악 채널을 한 시간 동안 방해 없이 들을 수 있기 때문인데 늘 11시 반쯤에 출발해서 자주 삼십 분을 놓친다.


채널을 돌리자 정오를 알리는 경쾌한 음악소리가 흐르고, 그만큼 신나는 김신영의 목소리가 반갑다. 자주 듣진 않지만, 한 번씩 들으면 그의 생기가 전해져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고기를 구워 먹은 후, 후식으로 볶음밥과 다양한 면 종류가 가득한 음식점에서 행복했다는 청취자의 사연을 김신영이 읽었다. 청취자는 이 고깃집 사장님이 '배우신 분', '뭘 좀 아는 분'이라는 말로 사연을 시작했는데, 아무리 배부르게 고기를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헛헛함을 밥이나 면으로 채워야 하는데 후식이 이토록 다양한 음식점이라면 사장님이 '좀 배우신 분'이라는 거다.


유쾌하게 달릴 생각으로 그의 목소리를 선택했던 거였는데 살짝 불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메뉴가 많았다는 말을 굳이 '배운 사람'이라고 표현해야 했을까. 이렇게 학벌주의를 조장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청취자도 그렇지만, 여러 '편견'을 깨고, 전국노래자랑 사회까지 보게 된 라디오 디제이(전국노래자랑을 김신영이 맡아하던 즈음)도 이런 말을 그대로 옮길 정도로 학벌주의는 참 대단하구나.... 생각을 하면서 남은 운전을 계속했다.





2학기 첫 모임.

처음 만나는 청소년이 있다는 뜻이다.


가볍게 시작하자는 의미로, 평소 많이 들어봤지만 우리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는 채로 접했을 '그리스 신화'가 A 반 첫 책이었다.


읽은 학생 반, 안 읽은 학생 반이다.

안 읽은 학생들도 들어는 보았던 이야기가 다수라 쉽게 쉽게 끄덕거린다.


내가 만든 조각상을 사랑하게 된 '피그말리온'. 너무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여기서 비롯된 말이라는 사실까지는 뭐... 네. 정도.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본다.


"그런데요. 피그말리온은 그렇다고 치고요. 갈라테이아(사람으로 변한 피그말리온의 조각상) 입장은 생각해 봤어요? 갈라테이아 입장에선 처음 만난 그 남자랑 바로 결혼해야 했어요. 세상이 어떤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생각해 본 적 없는 상대의 입장이다.


수천 년도 더 전에, 저 멀리 떨어진 곳의 신화를 지금 우리가 왜 읽어야 할까를 고민해 보자.


신탁을 해석하는 것은 결국 인간.

신화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입장은 너무나 다양한데, 이것이 지금 내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임을 상기시켰더니 그때부턴 참석자들 눈이 반짝이는 게 확연히 보인다.


티스베와 피라모스의 사랑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 같은 이야기인데, 이웃한 두 집의 남녀가 부모의 반대로 몰래 사랑하다 서로 오해로 죽게 되는 내용이다. 부모가 반대하는 사랑이므로 쉽게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은 두 집 사이 작은 틈을 기어이 발견하고 그 사이로 사랑을 속삭인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어떻게든 찾고야 마는 이 작은 틈. 청소년들에겐 있을까?


"패밀리 링크요. 엄마는 어떻게든 막는데 저는 어떻게든 뚫어요. 진짜 작은 틈을 어떻게든 찾아내요."

이런 틈은 막을 수 없다.

"캬캬캬캬 맞아요! 엄마가 비번 풀어줄 때가 있는데, 그거 알고서 미리 화면 녹화 기능을 해 놓고 엄마한테 폰을 건넸어요. 그것도 모르고 엄마는 비번을 그대로 눌렀고 저는 이제 제가 알아서 그 비번 누르면서 써요."


열린 세계로 향하는 이들의 사랑을 나도 배운다. 왜 내 아이들의 핸드폰은 스크린 타임으로 막으면서, 이곳에선 이들과 한마음이 되어 이들이 찾아내는 작은 틈이 이렇게도 신이 날까.


유명한 축구 선수와 이름이 같은 한 학생이 말했다(덧, 축구도 안 좋아하고, 못한다고.).


"천안문 저항운동이 일어났던 6월 4일을 중국에선 입에 담으면 안 된다고 해요. 인터넷 검열에도 다 걸리고요. 그렇지만 이 날짜를 기억하고 싶은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날을 말하고 싶어 해서,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5월 35일'이라는 말을 쓰고, 이날은 6월 4일 천안문 사태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어요. 이런 것도 작은 틈 아니에요? 나라에서 하지 말라고 해도, 하고 싶고, 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든 하잖아요."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의 피 흘리는 장면은 기억하지만, 5월 35일은 몰랐다. 모임 후에 좀 찾아보니 위화 작가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 등장한다고 한다. 심지어 집에 이 책이 있는데도 몰랐다. 집에 책이 있다는 말과 읽었다는 말. 그리고 기억한다는 말은 다 다르다.


실을 잘 자아서 아테나 여신과 대결을 했던 아라크네. 신과 대결을 응했던 것부터 인간의 거만함을 꼬집고 있는데, 아라크네의 yes는 자신감일까, 자만심일까. 이 둘은 어떻게 다를까.


"자신감은 적당한 것. 자만심은 과한 거죠."

"자신감은 타인과 상관없이 내가 만족하는 거고요. 자만심은 타인 앞에서 뻐기고 싶은 마음이라 타인이 필요해요."

"자신감은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까지 품고 있는 거고요. 자만심은 실패 따윈 생각도 안 하는 마음이에요."


책모임은 모두가 함께 먹을 음식을 각자 챙겨 오는 포틀럭 파티이며 진행자인 나는 그걸 준비하는 식탁보라고 언제나 소개하는데, 모임 후엔 늘 내가 제일 많이 챙겨 먹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실실 웃게 된다.


신화를 재밌게 읽는 법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어서, 현실에서 판도라 상자는 '원전 이슈' 같아서 내 삶과 연결되어 있다고, 딱딱하지 않은 모임이었다고 학생들이 후기를 들려주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제일 많이 먹었다. 이렇게나 먹어도 되는 걸까.


학생들이 떠나고 B 반 수업에 들어가기 전, 오늘도 나는 참석자들에게서 배운다는 문장을 긁적이는데, 오전에 들었던 김신영의 멘트가 앗! 하고 떠올랐다.


"사장님이 배우신 분이네요! 아, 역시 배운 사람은 달라요"


고기를 잔뜩 먹은 후에도 사람들이 더 먹고 싶어 하는 건 뭔지 유심히 고객을 살폈을 사장님. 그래서 다양한 면 종류와 밥을 연구해서 배부른 후에도 주문할 수 있도록 메뉴판에 내놓은 사장님. 배운 사람이 맞다. 2% 부족한 입맛을 배운 사장님 덕분에 채울 수 있었을 고객들.

학벌을 지칭하는 말이나, 학벌주의를 조장하는 느낌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 멘트에서 학벌까지 읽어낸 못난이가 바로 나.


'배운 사람'이라는 말은 어쩌면 '배우는 사람'이라는 말의 줄임말이겠다.


주위를 세심히 살피고, 사람들의 말과 생각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 사전에 나와 있는 뜻 그대로, 받아 익히고, 본받아 따르는 사람.


참석자들에게서, 라디오에서 오늘도 배운 후, 나 역시 그 고깃집 사장님처럼 '배운 사람'이 된 것 같아 또 실실 웃으면서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다양한 메뉴 고민은 다시 내 몫. 나는 배우는 사람이니까 또 고민하면서 메뉴 구성해야지.

오늘 '배운 사람'인 나는 내일도 배울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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