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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전, 너 사전

by 조달리

김애란 작가의 에세이 <잊기 좋은 이름>을 책친구들과 함께 읽다가 청소년 독서교실에서 나누면 좋을 게임이 생각났다.


첫 세션은 '나 사전' 만들기

학생들이 각자를 중심에 놓고 '나'를 알아가는 '나 사전'을 만드는 거다. ㄱ부터 ㅎ까지.

초성 하나에 단어 하나여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거든, 싫어하는 거든, 잘하는 거든 어쨌든 그 초성에 맞는 '나'와 관련된 단어를 생각한 후 그에 맞게 나를 설명하는 거다. 고맙게도 학생들이 나도 끼워준다고 해서 시작해 봤다.


내게 ㄱ은 너무 쉽다.


ㄱ - 과자

밥도 먹고 과자도 먹어서 내게 들어오는 에너지 총량은 언제나 과했다.

늦은 밤 과자는 특히 매혹적이다.

저녁을 든든히 먹었는데도 슬슬 배가 고파지는 밤 11시경, 과자를 모아두는 서랍장 문을 열고 나의 아름다운 수집품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힘들게 겨우 하나를 집어 든다. 오징어집, 나초, 오레오와 꼬깔콘 사이에서 눈과 손이 바쁘다. 이 과자와 함께하는 것은 무엇이든 아름답다. TV든, 음악이든, 영화든, 책이든, 옆 사람과의 대화든.


문제는 이제 나의 나이.


사십 대 후반부터 늦은 밤 과자가 몸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에 배가 더부룩해서 소화가 점점 어렵게 되어 아침 식사가 힘들어지는 것은 기본이다. 과자 먹고 침대에 누우면 잠들기도 어렵다. 배가 어느 정도 차 있어야 잠이 잘 왔던 위 건강한 시절도 이제는 안녕이다.


그래서 내 카톡 상태 메시지는 ‘과자 안 먹기’

설정한 지 60주는 넘은 것 같다.

'과자 안 먹기'를 주문처럼 걸어두었다는 것은 다짐이 여전히 지켜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보통명사 과자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구체적인 과자 봉지들이 진열대에 놓인 것처럼 내 머릿속에 주르륵 그려지고 그 순간 상상만으로도 흡족하다.

과자가 내 인생과 점점 멀어질 때 내 상태 메시지도 변할 것인가.


ㄱ은 고민하나 없었지만 그다음부터 생각보다 쉽지 않아 ㄹ은 빼먹고 ㅁ부터 쓰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 세션은

'너 사전' 만들기!

모두가 '나 사전'을 완성하고 나면 뽑기로 '너'를 선택하기로 했다. 정해진 기간은 없다. 너 사전 작업하고 싶으면 나 사전부터 완성하면 된다.


내 손에 들어온 '너'를 ㄱ부터 ㅎ까지 관찰하며 알아가기! 그래서 '너 사전'을 완성하기.


재밌겠다!로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속도가 더디다.


'나'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옛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고 말한 A.

A에게 '나'는 과거의 총합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보다 어제가, 지금보다 몇 년 전의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다. 그 몇 년이 촘촘히 쌓여 오늘의 내가 있겠지. 십 대 초반의 청소년에게도 과거는 매우 중요하다.


'나에 대한 낱말 찾기'가 그냥 재밌다는 B.

사전에 열거된 단어가 당연히 낱말인데도 '나에 대한 낱말 찾기'로 생각하진 못했다.

B 방식대로 해 보면 내게 어려웠던 ㄹ도 쉬워질 것 같은데?

쉽고 흥겹게 풀어가는 B가 그대로 보인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탐색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 기회가 생겨서 좋다는 C.

C에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의 총합이겠다.

'내가 싫어하는 것'의 총합이 '나'일 수도 있는데 C 에겐 아니다.

렌즈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걸 C를 통해 또 배운다.


이 숙제를 시작하면서 하루를 자꾸 돌아보게 된다는 D.

'오늘'이 D 에겐 중요한 '나'다.

이렇게 나를 풀어가면 과거가 엉망이었던 누군가도 오늘이 충실했다면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데?


내가 정의하는 '나'부터가 다르다. A부터 D까지 온통 다르다.

각자가 정의하는 개념부터 다른 이 언어 세계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러니까 내 세계를 너에게 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세심해야 하고, 정성스러워야 하는지


예문처럼 펼쳐 쳤던 '나 사전' 진행 상황 공유현장이었다.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각자의 사전 작업이 시작만으로 벌써 다양해서, '너' 정의부터 풍성해서, 과자 많이 먹은 젊은 날의 나처럼 기분 좋게 배부르다.

'나 사전'과 '너 사전'을 완성하면 새로 알게 된 사탕수수 내추럴 A4지에 출력해서 나눠야지. 예쁜 종이에 어울릴 단어 집합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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