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시한 날

내가 벗어 준 마음이 가난한 것일까

5인분의 가난을 책임지는 그의 어깨

by 책선비
그때 내가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한 것 - 고선경

우리가 사랑 때문에 자주 비굴해진다는 것
우리가 사랑 때문에 서로 미워한 적 있다는 것
기차 안에서 편지를 다 쓰고 눈 감은 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는 함부로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는 사람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둠을 겹겹이 입고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
우리가 함께 있으면 가난해진다는 게 슬프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벗어 준 마음이 가난한 것일까 봐
(...)
어딘가에 새겨진 우리가 비굴한 모습으로 서로 미워할지라도
기억하겠니?
바다는 아무리 헹궈도 바다라는 것
내가 너를 계속 사랑할 거라는 것
그때 네가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한 건 말이야
이미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다


6인 가정을 책임지는 외벌이 남편의 한숨이 깊어지는 어느 날 이 시가 나에게로 왔다. 그가 쏟아내는 하소연, 넋두리, 푸념은 맞벌이가 되어주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함을 지적하는 소리로 듣고 분노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를 사랑해서 결혼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에게 준 마음은 가난한 것이었고 4명의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큰 부담까지 주었다는 것. 그리고 고통에 신음하는 그를 향해 세속적이라며 비난의 말까지 주고 있었다. 나는.


따지고 보면 그는 가난하지 않다. 5인분의 가난을 책임지다 보니 그 역시 가난해지고 있다. 양말 하나 사는 것도 망설인다. 낡은 바지와 빛바랜 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다. 해결해 주고 싶지만 나는 그럴 능력이 없다. 능력 없는 나를 확인하고 들여다보는 일이 너무 괴로워서 한동안 그를 미워했다. 자신의 부담을 알아봐 달라고 한 말인데 그 마음을 받아주기가 어려워 도망가고 싶었다.


남편은 내가 해결사가 되기를 원했을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그도 아는데. 그냥 자신이 현재 경제적 압박감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감당하고 싶고 표시를 안 내고 싶은데도 불쑥 긴 한숨이나 잔소리로 터져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바라보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오해와 불신을 걷어버리고, 그 마음을 알아주기만 해도 문제의 반은 해소된다.


남편의 말 한마디, 반응 하나에 일희일비한다는 건 그만큼 그를 의존, 의지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제 그의 어깨에서 내려와야겠다. 거칠고 차가운 현실의 땅에 내 두발을 내려놓고 걸어갈 것이다. 같이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어깨동무를 하리라. 그동안 벌레 먹은 나뭇잎처럼 살아줘서 고맙다고,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라고 말할 테다.


벌레 먹은 나뭇잎 -이생진

나뭇잎은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