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선라이즈, 멸종위기사랑
나르키소스가 들여다보던 연못은 2천 년의 시간이 흘러 4.7인치 스크린으로 바뀌었다. 이찬혁은 '멸종위기사랑'을 노래했지만, 사라진 것은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을 제대로 아는 능력이다.
오늘날 사랑은 위협받고 있다. 안락함과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 없는 현대인들, 어느 것도 희생하지 않으려 하고 양보하지 않으려 하는 시장교환적 태도가 사랑의 자리를 점령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동일하게 만들고,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한다.
그렇다면 어떤 처방이 필요할까. 나는 신화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프시케의 여정은 한 여성이 미성숙한 존재에서 지혜로운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거쳐야 할 사랑의 심리적 발달 단계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은 어둠에서 시작된다. 낮에는 보이지 않는 연인, 밤에만 찾아와 속삭이고 떠나는 사랑. 라캉의 용어로 말하자면, 상상계(the Imaginary)의 사랑. 서로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완벽함, 상상으로 채워진 공백들이 만드는 설렘.
"나를 보려 하지 말라"는 에로스의 당부는 단순한 금기가 아니라, 미성숙한 사랑의 조건 그 자체다. 어둠은 프시케가 에로스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할 수 있는 스크린을 제공한다. 그녀는 에로스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상한 이미지를 사랑한다. 이 단계에서 사랑은 본질적으로 나르시시즘이다. 우리는 타자를 사랑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타자 속에 투사된 우리 자신의 이상을 사랑한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셀린과 제시를 떠올린다. 1995년 빈의 기차역에서 만난 두 사람의 하룻밤. 그들이 빈의 거리를 걸으며 나눈 대화들은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은 아직 현실의 무게가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무지에서 나온다. 서로의 일상을, 습관을, 상처를, 결핍을,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완벽한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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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을 지속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는 단순한 혼동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공들여 구축한 탁월한 성취이자 필연이다.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는 18세기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된다. 결혼이 경제적 계약에서 '사랑'의 문제로 전환되면서,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더욱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었다. "운명적 사랑", "완벽한 사람", "영원한 사랑"이라는 환상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미성숙한 자아의 방어기제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 소비문화가 작동하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20세기 초 드비어스의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캠페인은 치명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들이 판 것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라는 환상이었다. 사랑을 증명하는 물질적 기준, 몇 캐럿의 다이아몬드로 측정되는 감정의 깊이. 이것이야말로 한병철이 말한 "본질적 차이들을 지우며 평준화하는" 자본의 작동 방식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교묘하게 전가한다. "완벽한 사람"을 찾지 못한 것은 당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영원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은 당신의 사랑이 진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자본주의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는 결핍을 생산하고,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한 소비를 촉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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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이르러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는 한층 더 정교해진다. 데이팅 앱의 스와이프 메커니즘은 사랑을 완벽하게 상품화한다. 얼굴 사진과 몇 줄의 자기소개로 축약된 인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각 폐기되는 타자. 사랑은 소비재로 전락한다.
게다가 알고리즘은 개개인의 욕망까지 규정한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사람을 알고리즘이 추천한다.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의 욕망'의 디지털 버전. 우리는 스스로 욕망하지 않고, 알고리즘이 욕망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욕망한다.
'시뮬라크르'의 시대. 진짜 사랑은 사라지고, 사랑의 이미지만 무한히 복제된다. SNS에 전시되는 행복한 커플의 사진들, 정교하게 연출된 프러포즈 영상들. 하지만 이 이미지들이 가리키는 실재(the Real)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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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환상은 왜 이토록 강력한가? 프로이트는 인간이 현실 원칙(reality principle)보다 쾌락 원칙(pleasure principle)을 우선한다고 말했다. 불완전한 현실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완벽한 사랑이라는 환상은 이 고통을 회피하게 해준다.
하지만 환상은 결코 지속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의 잔혹함이 드러난다. 이 이데올로기는 환상이 깨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그 사람이 운명이 아니었다"며 다음 환상으로 도망가라고 부추길 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환상이 깨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단계는 필연적으로 도래해야만 한다. 진정한 사랑은 환상 너머에서 시작되므로. 프시케는 언젠가는 등불을 들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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