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 퇴사의 시대다. 여기저기 당당히 퇴사를 외치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물론, 어느 시절이건, 퇴사하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절이 싫으면 중도 떠나는 법이다.
달라진 거라면, 지금은 자신의 퇴사를 홍보할 수단이 제법 다양해지고, 투자 성공으로 경제적 자유를 획득한 파이어족이나, 퇴직 이후 창업가로서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정답은 없다. 어느 직장이든, 입사 후 30년을 다니다가 정년퇴직한다고, 그가 도전정신이 없다거나, 수동적인 삶을 산다고 폄훼하면 안 될 일이다. 강산이 3번이나 변하는 동안, 자리만 축내는데 월급 다 챙겨주는, 그런 곳은 없다,
모름지기 책임감 있는 가장이라면, 한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한 사회의 선량한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책임을 다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 그게 바로 보수의 품격이다.
모두가 창업가, 창작자가 될 필요는 없다.
문제는 퇴직 이후의 삶이다. 기대수명 100세의 시대, 건강관리에 신경 쓰는 추세를 고려하면, 어쩌면 그동안 살아온 만큼 퇴직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평범한 직장인의 고민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국민연금 고갈 소식은 들려오고, 저성장 저출산 고실업 인플레이션 같은 부정적인 뉴스들은 끊이질 않는다.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 후 대기업에 취업해 결혼하고, 아이 둘 낳고, 월급 잘 모아서 서울에 자가 부동산까지 마련한, 30년 차 대기업 직장인 김 부장마저도, 자칭 재테크 전문가, 창작자의 눈에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미련한 중년남으로 묘사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비트코인(B), 테슬라(T), 서울부동산(S)으로 대표되는 코인, 주식, 부동산에 자기 월급과 종잣돈을 제대로 안분 투자(포트폴리오 투자) 하지 않으면, 세상에 뒤처진 사람,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누구의 삶도 그리 간단하거나, 만만치 않다. 삶은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본인이나 가족 중 누가 아파 엄청난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기도, 가까운 친지나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목돈을 날리기도, 집주인 잘못 만나 전세 사기를 당하는 일도, 은행과 증권사를 믿고 가입한 펀드나 회사채가 망하는 일도 생긴다.
딴 데 한눈팔지 않고, 월급으로 삼성전자 주식만 잘 모아도, 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주식 전문가, 경제 유튜버들의 가르침에, 일견 그런가 보다 하다가도, 괜한 한숨이 나온다.
월급을 한데 모아 꾸준히 주식을 매입할 형편이 못 되는 사람도 많을뿐더러, 행여라도 내가 산 가격보다 몇십% 오르면, 그걸 팔지 않고 계속 보유할 신념의 가치 투자자는 애당초 평범한 직장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이 괜히 오마하의 현인(賢人)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실상은, 항상 오를 줄만 알았던 대한민국 최고회사의 주식이라도 일일이 설명하기 힘든 다양한 이유로 등락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행여 내가 산 가격보다 내리기라도 하면, 심장이 떨려오고, 본전 생각이 나서, 어떻게든 매도할 때만 기다리는 게, 평범한 우리네 삶이다.
장기적 우상향! 말은 그럴싸한데, 실제, 10년 전 최고의 기업이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지는, 지금 당장 구글 네이버 검색만 해봐도 알 수 있다. 10년은커녕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세상이다. 주식과 코인, 부동산의 가치는 일개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투자 올-인(All-in)은 금물이다.
막연한 성공이나 대박을 꿈꾸지 말고,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지위와 권세는 유한하고, 퇴직과 정년은 분명히 다가오기 때문이다. BTS가 제아무리 등락을 거듭한다 해도, 꾸준한 소득이 창출되고,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내 일이 있다면, 쉽사리 무너지지 않고, 발 디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P는 좋은 본보기다. 그는 얼마 전까지 모 중견기업의 책임자로 20년 이상 근무했다. 아직 정년까지는 10년 이상 남았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의 책임자이자, 아이 둘의 아빠이기도 하다. 서울 외곽지역에 아파트도 한 채 마련했다. 물론, 주택담보대출금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주식이나 코인으로는 별 재미를 못 본 듯하니, 어쩌면, 영락없는 <대기업 김 부장님> 사례의 전형이다.
그러나, P가 남다른 점이 있었으니, 그는 일찌감치 독립, 즉, 창업을 준비했다는 점이다. 주특기 없는 문과 출신에 영업직이다 보니, 아무래도 기술직, 연구인력들보다 회사 내 입지가 불안했다.
이는 늦은 승진 또는 잦은 부서 이동, 그리고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퇴사 종용 분위기로 감지된다. 그렇다면, 회사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자기가 먼저 회사에 이별을 통보하는 게 여러모로 깔끔하다는 생각이었다.
P는 5년 전 아내 이름으로 개인기업을 창업했다. 본사 주소는 아는 지인이 운영하는 공유 오피스텔 한 칸이었다. 보증금은 없고, 매월 관리비도 몇만 원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지인과 공동으로 빌렸으니, 창업에 든 돈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법인을 설립한 게 아니니, 납입 자본금을 마련할 필요도, 남에게 이사나 감사 자리를 요청할 일도 없었다. 시작이 요란스러울 필요는 없다. 겉이 아니라, 실속이 중요하다.
다행히, P의 아내는 남편의 속내를 잘 헤아리는 인생의 파트너였다. 창업은 결혼과 출산, 육아로 말미암은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의 설움을 날리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냉동/냉방기기, 공기조화기 유통과 설치공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P가 근무한 곳이 냉난방기 제조기업이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제품을 개발하거나, 생산한 것은 아니지만, 20년 회사밥이니, 제품 개발, 연구, 생산, 판매, 유지보수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과정은 다 꿰고 있었다.
더구나, P는 몇 년 전부터 차분히 독립을 준비해 왔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사업 프로세스를 더 유심히 관찰했을 것이다. 책임자가 됐다고, 책상 앞에만 앉아, 부하직원들 트집 잡거나, 거들먹거리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직접 거래처 사장님들과 만나, 산업계 현황 관련 공부도 하고, 틈새시장도 찾아 나섰다. 대규모 공사 현장에 투입된 현장 인력들과 소주, 막걸리 한잔 나누며 안면도 텄다.
제조, 건설 분야 사업은 사람이 만나고, 부대껴야 거래가 성사된다. 그렇다고, 엄연히 회사의 녹을 먹는 직장인이, 열 일 제쳐두고 퇴사 후 자기 먹고살 일거리 확보하겠다고, 자기 홍보만 하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소문은 빠르고, 사방은 온통 적이기 때문이다.
사업자를 내놓고도, 한 2년은 매출실적 0원인, 무늬만 회사였다. 유형의 매출액은 제로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자산, 그리고 사업 기반은 조금씩 갖추어져 가고 있었다. 축적의 시간이다.
P의 아내도 점점 이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났다. 처음엔, 여자가 무슨 냉난방 공사업체 대표냐며 괄시도 받고, 남편과 술자리에 다니는 것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어느 회사의 보일러가, 에어컨이 가격과 품질 면에서 경쟁력이 있는지 알게 됐다. 건축물의 용도와 크기에 따른 맞춤형 제품이 존재한다는 것도, 냉방기 설치공사를 위해서는 외부 용역업체와 신뢰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P 부부는 나라장터에 올라오는 관급공사 공개입찰에 참여하는 것으로 첫 공사를 수주했다. 당당한 시작이었지만, 공사원가를 너무 낮게 계산한 탓에, 실제로는 남는 게 없는 장사였다. 아니, 실제로는 자기 인건비 계산하면, 손해였다. 남들보다 낮은 가격을 써내야 낙찰되는 구조다 보니, 돈은 안되더라도, 일단 경험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업계 베테랑들은 공사원가율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하는 초보라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P 부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길게 보고 시작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저기서 납품 의뢰가 증가했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성실하게 공사를 수주해 마무리한 실적들이 쌓였기 때문이다. 넓은 인맥과 정보도 한몫했다. 냉난방기가 설치되지 않는 건물 신축 현장은 없다. 일반 가정, 기업, 공공기관에서도 공조기, 에어컨 교체수요는 늘 존재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남편이 영업 전문가, 아내가 구매 및 경영관리 전문가다 보니, 상시종업원은 베테랑 기술 인력 1명이면 충분했다. 외주인력 인건비, 직원 월급, 원재료 구매대금을 지급하고 나서, 남는 게 있으면 부부의 상여금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때는 납품처로부터 판매대금 회수가 늦어지거나, 심지어 야반도주로 돈을 못 받은 일도 있었기에 보너스는커녕 적자 보는 달도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아직 회사원인 P의 고정 수입이 있고, 조금씩 적립해 둔 수익금도 있었기에 5년을 버틸 수 있었다.
큰돈은 벌지 못했어도, 5년 동안 회사가 살아남았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취다. 현실적으로 창업 후 3년 내 폐업률이 70%를 넘는다.
그동안 경험과 실적이 쌓이고, 기업가의 윤리성, 성실성, 책임감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았으니, 이는 돈 몇 푼으로 쉽게 환가(換價)될 수 없는 회사의 자산이기도 하다. 다행히 지난 3년간 회사 매출액도 10억, 20억, 30억 수준으로 계속 성장해서 이제 어느 정도 사업 기반도 갖추어진 셈이다.
그러는 사이, P는 퇴직을 준비했다. 아무리 알려진 회사라 해도, 재벌기업이 아닌 이상, 업황이나 경기 흐름에 따라 회사 매출과 이익은 등락을 거듭하기 마련이다.
외부적으로 잘 알려지진 않아도, 웬만한 직장인은 늘 구조조정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산다. P라고 예외는 아니다. 회사의 핵심 인재가 아닌 이상, 아니 제아무리 개국공신이라 하더라도,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는 상존한다.
안 그래도, P는 영업직이라는 직무의 한계, 영업실적 달성에 대한 스트레스, 몇 안 되는 승진 자리를 향한 치열한 내부경쟁을 다 이겨낼 자신이 없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진작부터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몇 해 전부터는 주변 모두에게 좋은 동료로 인정받는 중이었다. 지나친 경쟁은 선량한 인간의 눈과 귀를 막는 요소임이 분명하다.
P는 더 이상 회사에 거짓말하거나, 죄를 짓는 심정으로 지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년 전, 회사 임원진에게 퇴사 의지를 밝히고, 법인을 설립했다. 창업한 회사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세금도 아끼고, 체계적이고 건실한 기업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아내 뒤에 숨은 조력자, 실제 경영자로서의 야누스적 삶은 이제 안녕이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 바로 처리될 줄 알았던 사표는 1년간 수리되지 않았다. 배우자의 사업체가 본사에 직접적으로 피해가 되지 않는 이상, 본연의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이상, 조금 더 회사를 위해 일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아직 P를 대체할 만한 실력 있는 책임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퇴사 만류의 이유였다.
자기 인생을 살고자, 남 비난하지 않고, 승진에 대한 마음도 접고, 업무에만 집중했더니, 직장생활에도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다. 담당 임원마저 그의 사업에 관심을 표명하며, 본인의 퇴사 후를 상담 요청하는 형국이었다. 존경하던 회사 상급자가 자기를 채용해 주면, 신규 거래처 몇 군데는 따 놓은 당상이라며, 반 농 반 진의 취업 청탁까지 하는 아이러니한 일까지 생겼다.
그렇다고, 계속 이중생활을 할 순 없는 일이다. 자칫하다간, 시작과 마무리 둘 다 잘못될 수 있다. 양다리는 금물이다. 남 잘되는 꼴은 못 보는 게 우리네 범인들의 심보 아니겠는가. P는 미련 없이 회사를 나왔다.
개인기업의 자산과 부채를 포괄적으로 양수도 받아 법인을 설립했다. 어찌 보면, 새로운 시작이지만, 실제로 달라진 건 없었다. 사무실 본사도 그대로요, 법인의 대표이사도 여전히 그의 아내다.
다만, P도 이젠 뒤에 숨지 않고, 등기이사로 등재되어 바깥 업무를 도맡고 있다. 이중생활은 멈추고, 내 사업에 집중할 수 있으니, 누굴 만나도 떳떳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나중을 위해 주식 지분은 자녀들에게도 배정했다. 자기 주식 발행하고, 증여하기. 본래 재테크는 이렇게 하는 거다. 잘 모르는 회사 주가가 오르기만을 기도하거나, 대리인에게 경영권을 맡기지 않고, 본인 역량으로 기업가치를 높여 자연스럽게 부가 따라오게 만드는 것, 이게 최선이다. 성공도 실패도 오롯이 본인에게 달려 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증명만이 남았다. 감히 단언컨대, 액면가 5천 원짜리 주식의 상승 가능성은 높다. 동종업계 근무 경력 20년에, 경영자로서의 경력 5년, 부부 합계 10년이니, 축적의 시간으로 충분하다.
작년 이월공사, 올해 수주공사, 신규 견적 건을 합치니 50억 원도 넘는다. 법인설립 첫해 매출액 치고는, 누가 봐도 선방이다. 게다가, 이들은 성공의 필요충분조건, 부부 공동창업 아니던가. 여러모로, P는 퇴사의 정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