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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코스닥기업 2세 경영자의 숙명

by 임요세프

우리나라의 법인기업은 약 95만 개다. 그중에서 상장기업의 숫자는 약 2,500개에 불과하다.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된 기업이 800여 개, 코스닥 시장에 등록된 기업이 1,700개 정도다. 단순 계산하면, 기업 중 상장사가 될 확률은 0.3%에도 못 미친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이라 할 만하다.

물론, 모든 기업인이 상장사의 대표가 되길 원하는 건 아니다. 회사를 외부에 공개한다는 건 유명한 회사가 되는 것 그 이상의 문제기 때문이다. 사내 유보금이 충분하거나,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아 소수의 주주로부터 충분한 자본금을 모집하였다면, 굳이 일반인(대중)에게까지 회사를 공개하고, 미주알고주알 모든 현황을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상장사 대표라는 타이틀이 주는 성취감과 기쁨은 일시적이다. 반면, 기업공개 이후 수많은 이해관계자, 주주(투자자)들을 어르고 달래며, 수시로 매출액·영업이익·사업계획을 보고하고, 주가·배당 상승방안을 고민하는 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대표자를 포함한 주요 임원, 대주주의 일거수일투족도 경영공시라는 이름으로 만천하에 공개되니, 경영자는 자유로운 삶을 기꺼이 유보해야 한다.

사실, 기업가가 처음부터 상장을 생각하며 창업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생존과 성장을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하다 보니, 어쩌다 그 자리까지 간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회사가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혁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설비투자, 연구개발, 인재 채용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 자금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자기 자금만으로 필요한 투자금을 모두 조달하기 어렵다. 그래서, 기업은 홍보활동(IR)을 통해 외부인으로부터 자본금을 모집한다.

처음부터 “나를 믿고 돈 좀 투자해 주세요”라고 다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자 계획한 창업가는 없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사(Angel)를 찾아 나설 따름이다.




나의 오랜 벗, Y의 부친도 그러했다.


그는 30대 중반, 10년 다닌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창업했다. 휘하에 백 명 이상의 부하직원이 있었다니, 이른 성공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그렇지만, 본인의 회사를 설립한 후에야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고 하니, 그는 영락없는 기업가였던 셈이다.

그도 처음엔 다니던 모기업에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 업체로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땅 짚고 헤엄치기 같은 수월한 영업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려고 창업한 건 아니었다. 기술력 기반의 100년 기업을 꿈꾸었기에, 경쟁력 있는 후속 아이템 발굴에 전념했다. 치열한 고민 끝에 반도체 부품 전문기업으로 목표를 정했다. 정확히는 반도체 장비와 인쇄회로기판(PCB)의 충격을 흡수하거나 줄일 수 있는 패키징(포장) 부품 생산기업이다. 오랜 공부의 결과였다.

그가 투입한 자본금은 자그마치 15억 원에 이른다. 설비매입비 5억, R&D 5억, 개발비 5억 원이다. 2000년대 초반이었으니, 현재가치로 보면 30~40억 원은 족히 넘을 만한 액수다. 아들 둘을 둔 30대의 가장, 창업 초기기업 CEO가 감당하기엔 벅찬 수준이었으리라.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건 인생 투자라 할 만하다. 1세대 모험 기업가(벤처)는 이렇게 탄생했다.


문제는 그 돈을 다 쏟아붓고도 제품개발이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분명히 끝이 보이는데,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대로 멈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느덧 기술개발은 단순히 한 개인의 부귀영화를 넘어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꼭 완성해야 할 소명(召命)이 되어 있었다.

은행도 친구도 그를 외면하던 시절, 안절부절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찰나, 때마침 생면부지의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회사 기술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투자자로부터 무려 30억 원을 투자받았다. 기술력과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받았던 탓에, 수십억을 투자받고도 대표자의 경영권(지분율)은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천사 같은 투자자를 만난 셈이다. 궁하니 통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Y의 부친은 국내 최초로 반도체 패키지 소재 기술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삼성전자의 협력 업체가 됐고, 2005년 마침내 코스닥 시장에 입성했다. 퇴직 후, 불과 몇 년 만에 이룬 성과다. 남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호사가에게는 그저 운(運) 좋은 결과로 폄훼될 수도 있겠으나, 하루아침 하늘에서 상장기업이 뚝하고 떨어질 리는 없다. 0.2%의 기적은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행운이다.



Y와 나는 대학 졸업반 시절 함께 공부했다. 우리의 목표는 대기업, 그리고 언론사 입사였다. 독서와 논술, 상식, 경제학을 공부했고, 연이은 낙방에 함께 좌절하기도 했다. 우리보다 실력이 부족한 것 같은 친구들이 하나둘 취업에 성공해 나갈 때마다, 우린 쓴 소주잔을 기울였다.

노력이 계속 배신하지는 않는다. 시간이 흘러 Y와 나도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Y는 역사학도였는데, 국제대학원에 진학해 영어까지 정복한 후, 반도체 대기업에 입사했다. 물론, 당시 나는 그가 코스닥기업 CEO의 자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마 Y 본인도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사회에 막 진출하던 그 시절, 공교롭게도 Y의 부친은 회사를 코스닥에 등록했다.

조금 더 정의로운 세상, 따뜻한 자본주의를 논하던 20대의 Y는 기업가보단, 저널리스트의 자리가 어울렸다. 아버지 회사 이야기는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않던 걸 보면, 기업승계는 그의 인생 시나리오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천륜(天倫)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다. 그가 언론사 입사 대신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반도체 회사에 취업한 것도, 지금 돌이켜보면, 정해진 숙명(宿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 나는 지금의 내가 됐고, 그는 어엿한 코스닥기업의 CEO가 되었다. 독립적인 글쟁이가 되고 싶어 했던 Y가, 180도 다른 위치의 기업가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과정을,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아마도 혁신(革新)과 각성(覺醒)의 연속이지 않았을까 지레짐작만 할 뿐이다.

원치 않는 길에 들어섰다는 혼란스러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을 아버지와의 갈등, 기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는 책임감, 직원들의 편견 등 여러 부정적 감정이 그를 압박했을 것이다.


상속받을 지분가치가 수백억에 달한다 한들, 그가 마냥 기뻐했을 리 없다. 오히려, Y는 책임경영의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스스로 일군 부(富)도 아닐뿐더러, 그는 부잣집 도련님이 아닌, 저널리스트를 꿈꾸던 역사학도였을 뿐이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고, 피는 속일 수 없다. 전형적인 문과생 Y는 기술 기반 기업의 CEO로 거듭나기 위해 아버지 못지않게 치열하게 연구하고, 공부했을 것이다. 자칫하다간, 평생의 과업으로 일구어 온 탄탄한 기업이, 2세 경영자의 판단 착오로 바닷가에 쌓은 모래성처럼 쉽사리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기보다, 정상을 지키는 게 더 힘들다. Y는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신중하게, 15년을 버텨냈다. 15년은 그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는데 충분한 시간이다.




그사이, 회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반도체 소재부품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주력 제품에 따른 기업분할(스핀오프)을 통해 10개 이상의 계열사를 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코스닥에 상장한 기업만 해도 3개에 이른다. 연간 총매출액은 5천억을 넘고, 기업의 시가총액은 1조 5천억~2조에 이르며, 종업원 수는 천 명이 훌쩍 넘는다. 그야말로, 벤처 성공의 신화다.


Y의 부친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지 몇 년째니, 이젠 경영수업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Y가 곧 회사의 얼굴이다. 네이버 경제 부문 뉴스 면에 그와 회사가 오르내리는 걸 보면, 이제, Y는 누군가의 오랜 친구보단,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과 미래 신성장 동력산업을 이끌어 갈 차세대 CEO라는 호칭이 어울린다.

그의 남다른 행보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기반을 둔 기술기업, 청년고용 활성화와 인재 개발에 힘쓰는 기업으로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도 받고, 숱한 산업 포상과 수출탑도 수령했다. 장관과 총리의 방문이 이어지는 걸 보니,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애국 기업임이 분명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은퇴한 부친이 출연한 사재 수백억 원을 토대로, 그는 지역의 벤처기업, 아이디어와 기술력이 뛰어난 청년 기업가들을 물심양면 후원하고 있다. 이십 년 전 아버지가 이름 모를 투자자의 도움으로 성공할 수 있었듯이, 이젠 그가 천사가 되어 모험적 기업가들에게 마중물을 제공하고, 성장을 위한 가속페달(accelerator)을 달아주고 있다.

산업경제 분야 투자의 선순환이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선의의 투자자·행동가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걸 보면, 차가운 자본주의 이면에 자정작용이 작동하는 게 분명하다.




얼마 전, 한동안 잊고 지내던 Y에 대한 뉴스가 났다. 본격 2세 경영을 위한 지분승계가 마무리되어 간다는 소식이다. 지분 영 점 몇 퍼센트 증여에 증여세만 수십억이라는 자극적인 소식에, 호사가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부러움 반, 시샘 반이다.


증여세를 내기 위해 주식을 팔고, 주식과 부동산을 담보로 수십억의 대출까지 받아야 한다. 회사의 경영권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십수 년의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2세 경영을 준비하더라도, 여태 승계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걸 보면, 지분 증여와 경영권 승계가 얼마나 난제인지, 그리고 그동안 회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아직도 일부 주주들은 Y의 경영역량에 대한 의문부호를 거둬들이지 않고 있는 듯하다.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건 그가 평생 풀어야 할 숙제일 수도, 아니 어쩌면, 영원히 풀지 못할 난제일지도 모른다. 역량을 증명할 특별한 방법은 없다. 시간을 두고, 실력과 실적으로 최고경영자로서 가치를 스스로 드러내는 수밖에.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전반적인 경기침체와 수요부진으로 작년 동기 대비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다소 감소했으나, 내년부터는 회사에서 생산하는 IT 부품의 수요 증가로 매출액과 이익이 증가할 것이라는 증권회사들의 보고서가 이어지고 있다. 회사도 이에 발맞추어 연구개발 투자와 설비투자에 적극적이다. 이런 추세가 반영된 탓인지, 올해 하반기 주가는 계속 상승세다.

대표이사 Y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이다.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과는 거리가 먼, 그의 심성과 인간 됨됨이는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인 듯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타고난 성정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 점도 다행스럽다.

물려받은 왕좌(Chair)에 앉았지만, Y는 분명 아버지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꿈을 꾸는 동상이몽(同床異夢) 의장(Chairman)이다. 그가 주도한 지역인재 고용 확대, 수평적 조직문화는 회사를 지역 젊은이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다. 환경개선(E)·사회공헌(S)·주주가치(G)를 중시하는 경영철학도 시대정신에 부합한다.


생에 우열을 가릴 수는 없고, 아직 내 갈 길도 멀지만, 우리 둘 사이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나마 뜸해진 연락과 안부에 사람 변했다는 넋두리를 늘어놓던 나를 반성하게 된다. 서는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이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열등감 가질 필요는 없다. 모두 각자가 짊어질 저마다의 무게가 있을 뿐이다.

앞으로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 그의 안부가 궁금할 때마다 회사 주식을 매입하기로 한다. 소액주주에 불과할지언정, 장기투자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그를 응원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리라. 언젠가 Y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날, 보유 주식을 전량 매도한 후, 높은 투자수익률에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으로 내 안부를 대신하기로 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말하지 않아도 안다. 성공한 기업가, 성공한 투자자가 되어 만날 그날이 벌써 기다려진다.


무게를 잘 견디는 자에게 왕관이 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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