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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권하는 사회

영화 <화차> 비틀어 보기

by 임요세프

2012년 영화 <화차>를 뒤늦게 보았다. 제목인 화차(火車)는 본래 불교의 용어로, 나쁜 짓을 한 악인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불타는 수레를 뜻한다. 미야베 미유키의 일본소설이 원작인데, 일본에서는 화차를 돈 문제로 빚에 시달리는 괴로운 현실을 의미한다고 한다.


한국의 현실이라고 해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으니, 일본소설을 한국 영화화해도 공감을 얻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화차는 한번 올라타면 절대 내릴 수 없는 지옥행 열차라고도 해석된다. 이는 여주인공 경선의 운명을 의미하는 제목이기도 하다.


10년도 더 된 영화다. 강산도 변할 만큼 시간이 지났고, 최첨단 정보혁명을 선도하는 수도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지라, 아무래도 빛바랜 느낌이 들어야 정상일진대, 영화는 지금 보아도 현실적이다. 2G 폰과 용산역 공중전화기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주고받는 대화는 2023년 현재도 유효하다. 아프고, 쓰리다.




요컨대, 화차는 빚 때문에 괴로워하던 경선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결국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다.


가치 저장의 수단이자, 교환의 수단인 돈은, 그러나 태생적으로 과잉 생산된다. 돈이 순환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플러스알파의 가치를 추가로 부여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시작점은 은행이다. 그보다 앞서 은행의 은행인 중앙은행이 최초의 신용(이자)을 부여해 시중은행에 빌려주면서 대순환이 시작된다. 이자라는 마법이 없다면, 처음 발행된 돈만 돌고 돌뿐 새로운 가치가 창출될 리 없다. 그렇게, 빚 권하는 사회가 탄생했다.


실은 이자를 내고 돈을 빌려 쓴 자(가계, 기업)가 세상을 발전시키는 주역이다. 빌린 돈을 제때 상환하거나, 높아진 신용으로 더 큰 빚을 내는 자는 은행과 정부로부터 VIP 고객, 혁신적 기업가라는 명목하에 우상화되기에 이른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제품, 상품, 서비스가 생산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장 참여자가 나타난다. 한 주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 본인이 가장 자신 있는 일에 집중할 때, 생산성과 효율성은 극대화된다. 이 과정은 생산물이 최종 소비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최적의 생산품을 내놓는 데 반해, 누군가는 불량품을 생산하거나, 필요 이상의 양을 과잉 생산하기 때문이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 원금이나 이자를 제때 납부하지 못하는 순간, 모험적 혁신가는 순식간에 빚쟁이로 전락하게 된다.


은행, 카드사, 저축은행, 대부업체, 사채업자에 이르기까지, 사실 모든 채권자는 같은 입장이었을 테다. 빚낸 자의 신용을 믿고, 빚을 권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빚낸 자가 보유한 자산의 담보가치, 혹은 보증인의 재력보다는, 애당초 그가 계획했던 사업(일)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기꺼이 돈을 내주며, 응원하였음이 분명하다.




주인공 경선의 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그도 세상에 없던 새로운 제품, 혹은 기존보다 더 높은 효용을 주는 상품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우리 사회의 선도자, 진보주의자였다. 더구나, 소매상도 도매상도 아닌 공장이라니, 더 혁신적이요, 모험적이다. 기계설비 들이고, 건물 짓고, 원재료 매입하고, 직원 채용까지 했을 텐데, 이는 웬만한 자신감, 그리고 사명감 아니고서는 감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실함과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드는 제조업체, 공장이 한번 실패하면, 더욱 회복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제품 수요를 잘못 예측한 본인의 판단 착오든, 납품처의 부도로 인한 판매대금 회수 불능이든, 갑작스러운 코로나 발생으로 인한 강제 셧다운이든, 내 잘못 네 잘못을 가리지 않는다.


채권자는 비 올 때 우산을 빼앗아 간다. 그마저도 너 나 할 것 없이 자기네 회삿돈 먼저 갚으라며 난리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유독 대부업체, 혹은 개인 채권자(사채업자)가 문제다. 어디서 많이 보던, 뻔하고 진부한 클리셰다.


물론,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불법 사채업자, 고금리 악덕 대부업체로 인한 피해를 보았던가. 신체적 정신적 폭력, 밤낮 가리지 않는 불법 채권추심, 이자에 이자가 붙는 과도한 연체이자율, 가족에 대한 협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간 수많은 사례를 보고 들었다.


그러나, 영화가 현실을 과장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사채업자가 워낙 무섭게 그려지다 보니, 빚은 절대 져서는 안 되고, 사업(장사)도 하면 안 되며, 채권자는 무차별하게 모두가 악덕 사채업자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경선의 아버지가 빚쟁이, 신용불량자가 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선은 절대 채무자가 아니다. 영화 어느 부분을 봐도, 그녀가 아버지의 채무에 연대보증을 섰다거나, 사채(대출)를 썼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도, 실종된 아버지와는 별개로, 어머니는 죽고, 경선은 만신창이가 됐다.




단언컨대, 2012년에도 빚 연좌제 같은 건 없었다. 차라리 아버지가 죽었더라면, 상속을 포기해서 빚을 떠안지 않았으리라는 경선의 독백은 참말일 수가 없음을 알기에 더욱 답답했다. 아버지가 실종되었으니, 딸인 네가 돈을 대신 갚으라는 사채업자의 협박은 지나친 영화적(소설적) 상상력이요, 비약이다.


불법적 협박과 위협에, 경선도 그녀의 남편인 승주도 저항 없이 불행을 받아들이고, 경찰에 신고하는 시늉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못내 아쉽다. 경선이 장사 접고, 이혼하고, 도망가다 사채업자에 붙잡혀 신체 포기 각서 쓴 후 험한 곳으로 팔려 가는 장면에까지 이르니, 쓰디쓴 현실을 비판하려는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은커녕, 반감마저 생긴다.


세상에서 가장 치안이 훌륭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10년보다도 훨씬 더 된 우리나라의 자랑거리다. 경선을 비롯한 영화 속 모든 인물은 이 점을 잘 알 만큼의 지적 역량과 소양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모두 침묵할 뿐이다.


아마도, 채권추심(債權推尋)은 절대 악(惡) 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아닐까 싶다. 살다 보면, 누구든 빚을 낼 수 있지만, 빚 상환독촉, 즉 채권추심은 자제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다는 판단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험상궂은 사채업자를 내세워, 그가 불법적인 위해를 가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채무상환 요청은 나쁜 짓이라는 사회적 동의를 구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책임은 각자가 공평하게 지는 것이 맞다. 어느 한 당사자가 일방적으로 책임을 부담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빚을 낸 차주(借主)가 채무상환을 위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 본래, 모든 채권자는 평등하다.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채권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 더 낮은 금리로 빌려준 채권자에게 더 큰 고마움을 느낄 수는 있겠으나, 나중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고금리의 빚부터 상환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어쨌든, 더 이상 빚을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는 본인의 깜냥껏, 가진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라도 빚잔치를 해야 한다. 만약, 채무가 재산을 초과한다면, 차라리 두 손 두 발 들고, 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재산을 타인 명의로 돌리거나, 어느 일방의 채권자에게만 우선변제 하는 건 자칫, 하나를 얻으려다 모두를 잃는 일일 수 있다. 회생, 신용 회복, 파산, 면책 같은 공식적인 법률제도를 활용해야 한다. 영화 속 선영이 개인파산/면책을 신청했던 것처럼 말이다.


일반적으로, 소유부동산이나 재산에 우선순위 근저당권을 설정한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문제가 생기더라도, 해당 재산을 경매에 넘기거나 근저당권 채권을 처분해 원리금을 전액 회수하거나, 손해를 최소화할 가능성이 크다. 보통은 은행, 보험사, 카드사, 저축은행 등 대형 금융회사들이 그 혜택을 본다. 사업가는 제일 먼저 이들을 찾아가 돈을 빌리고, 담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제도권 금융회사들은 일반 개인에 비해 정보 접근이 쉽고, 폭넓은 정보 네트워크도 갖추고 있기에 채무자의 예금, 적금, 보험금, 숨겨진 부동산까지 손쉽게 찾아내 손실을 만회할 수 있다. 바로, 정보의 비대칭성이다.


세금 문제에 관한 한 국세청도 마찬가지다. 정보의 우위에 더해, 채권 회수 전담 특수조직(38 기동대)까지 가동하니 비교적 수월하게 임무를 완성한다. 악덕 채무자가 숨겨놓은 세금을 환수하기 위한 그들의 고군분투를, 우리는 드라마, 영화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의 노고에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응원한다.


그런데, 대부 업체나 사채업자라면 사정이 좀 다르다. 아무래도, 제도권 금융의 이용이 어려운 저신용자, 기존에 빌린 돈으로는 상황 해결이 어려워 추가로 돈을 빌리려는 사업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늘내일 당장 급전이 필요한 생활인이 이들을 찾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려주는 순간 돌려받지 못할 악성 채권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직접 대면해 말해주지 않는 이상, 어디에 무슨 재산이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높은 이자율을 요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제도권 금융권에서 모든 자금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문제의 본질이다. 은행은 돈이 필요 없는 이에게 돈을 빌려주고, 고리대금업자는 돈을 갚을 수 없는 자에게 일단 돈을 주고 본다. 공정한 채권추심을 명령하는 법은 있으나, 공권력(경찰력)이 미치기 어려운 현실적 지점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악순환이 반복된다.




빌려주고, 빌리는 걸 막을 수는 없다. 피해를 막기 위한 노력의 지속으로 법정 최고금리는 2002년 대부업 법 제정 당시 66%에서 20%까지 낮아졌다. 금전소비대차 계약을 체결할 때 당사자 간 특별히 이자율을 정하지 않는 경우 우리 민법은 연 5%의 법정이율을 적용한다. 공짜가 없음이 법으로도 명시된 셈이다.


영화 속 형사들은, 가짜 신분으로 살며 후속 범행을 노리는 경선을 잡으려 애쓰기 전에, 우선 불법적인 채권추심을 막기 위해 노력했어야 맞다. 행여 당사자가 법률 지식이 부족해 신고하는 걸 몰랐다면, 동네 주민이든 가게 손님이든 보편적 상식과 합리성을 가진 시민이 돕고, 공권력이 개입해 사채업자의 폭주를 막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비극은 조기에 종료되고, 해피엔딩을 맞이했을 것이다.


경선의 범죄,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문호의 친구이자 은행원인 동우는 경선이 과거 개인파산을 했다는 이유로, 문호를 혼란에 빠트렸다. 다 끝난 일, 시효가 완성된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 엘리트 은행원이 이를 애써 외면하고, 개인정보까지 누설했다.


문호의 사촌 형 종근도 뇌물수수로 옷 벗은 전직 형사이자, 순수하게 동생을 도우려는 마음보단 돈을 받고서야 움직이는 허점투성이였다. 문호의 부친 역시 상처받은 아들의 마음을 달래기보단, 아들의 파혼 소식에 본인 체면만 걱정하는 속물일 뿐이다.




영화 화차는 돈의 위력, (불법) 채권추심의 악랄함, 인간의 탐욕, 그로 인한 여러 사람의 파국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한계, 개인의 운명 운운하며 무기력하게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성실한 실패자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책임을 지워야 한다. 남몰래 자산을 숨겨놓거나 고의로 부도를 내지 않은 이상, 최초 모험적 투자자로서의 기업가정신, 그리고 그가 남겨둔 유무형의 자산은 이 사회가 최대한 흡수하고 인정해야 한다.


은행을 비롯한 채권자들은 채권자로서의 적법하고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되, 불법추심에는 공동으로 적극 대응하는 등 선량한 관리자로서 의무를 다하고, 무자력의 채무자에게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자칫하다간, 아무도 빚내지 않는 사회, 혁신과 성장이 정체된 시대로 회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건전한 시장조성자, 공정한 감시자로서 정부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영화 화차의 총제작비는 16억 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유야 간단하다. 투자자 모집이 잘 안 됐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하니, 감독, 프로듀서, 주연 배우들도 받을 돈 덜 받고, 관객 수에 따른 러닝-개런티 계약을 체결했다. 위험에 기꺼이 동참한 것이다. 예상을 뒤집고,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흥행해서 다행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투자자는 빚더미에 앉았을 것이다. 연출진과 스태프들도 한동안 배를 곯았을 것이다. 16억을 쏟아부은 후, 돌려받을 건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는 제작진과 연출진 이름 목록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영화인들이야말로 <빚 권하는 사회>의 최전선에 있다. 화차의 감독 변영주도, 그 유명한 박찬욱과 봉준호도, 숱한 실패를 겪은 후에 반석(盤石) 위에 올랐다.


실패가 속출한다 해도, 빚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길은 없다. 성실한 실패자의 경제적 손실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바로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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