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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한강, 그리고 우리

노벨상에 대해 우리가 모르고 있던 것들

by NowHereUs


20241017102832126pnlb.jpg Statue of Alfred Nobel. Photo: A. Mahmoud from https://www.nobelprize.org/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1901년 첫 수상자를 발표한 노벨상은 2024년 현재까지 물리학, 화학, 생리학 또는 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등 6개 부문에서 627개의 상이 수여되었으며, 수상자는 총 1,012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노벨상을 여러 번 수상한 사람과 기관을 포함한 것이기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는 1,012명이다.” 라는 문장은 틀린 명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마리 퀴리(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 외에도 물리학상을 두 차례 수상한 존 바딘(1956년, 1972년), 화학상을 두 번 받은 프레데릭 생어(1958년, 1980년)와 K. 배리 샤플리스(2001년, 2022년)도 있다. 주목할 만 한 것은 1954년 화학상과 1962년 평화상을 수상한 라이너스 폴링이다. 이 외에도 적십자와 유엔난민기구는 각각 3회, 2회 평화상을 수상한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


노벨 문학상은 다른 부문과 달리 공동 수상이 드물다. 올해도 물리학, 화학, 생리학, 경제학에서는 공동 수상자가 여럿 나왔지만, 문학상은 한강 작가가 단독으로 수상했다.

노벨상을 공동 수상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세 명이지만, 지금까지 121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단 한 번도 3인이 공동 수상한 적이 없다. 네 차례에 걸쳐 2명이 공동 수상한 기록이 있지만 마지막 공동 수상은 1974년에 있었던 일이다. 이는 공동 연구의 기여자를 연구 업적에 기재하는 것이 정례화된 다른 분야와는 다르게 명시적으로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각주를 달듯 표기하지 않는, 문학 작품의 특수성이 반영 된 것이 아닐까.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아시아 첫 여성 작가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문학상을 수상한 121명 중 여성은 단 18명에 불과하고, 노벨상 뿐 아니라 세계 문학상을 통틀어 아시아 여성 작가의 수상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한국에서 한강 작가의 수상을 두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낯설고도 반가운 독서 열풍

노벨상 위원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한강 작가의 책을 읽어본 사람은 전체설문 응답에 41퍼센트에 불과하다. 나머지 59퍼센트의 사람들이 그녀의 작품을 찾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10월 16일 오전 9시 기준으로 한강 작가의 책은 이미 103만2천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종이책 판매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전자책이나 해외 판매를 포함하면 그 수치는 더 늘어날 것이다.

편성준 작가에 따르면, 한 도서관에서는 한강 작가의 책이 품절되어 그녀의 작품 대신 제목이 <한강>인 다른 소설을 빌려가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링크)


누군가는 이번 책 구매 열풍을 두고 곧 중고서점에 한강의 책이 쏟아질 것이라는 섣부른 예측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 열풍이 반갑다.

오랜 시간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이 출판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았던가.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기 위해 서점에 가고, 책을 주문하는 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혹여 책이 없어 발걸음을 돌리더라도 서점까지 간 김에 다른 작가의 책을 집어들 기회가 늘어난다면 그것 또한 긍정적인 현상일 것이다.


물론 한강의 수상이 모두가 기뻐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다.

왜 다른 작가가 아니라 한강이어야 했냐, 상의 영광은 작가가 아닌 번역가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작가의 출신지와 정치적 성향을 연결짓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모두가 한마디씩 하고 싶은 마음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국가적 경사’ 라는 다소 고루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국뽕’에 차오르게 만드는 일임을 부정 할 수는 없다.

이 들떠 있는 분위기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이거나, 무식한 사람이거나, 질투에 눈이 먼 사람으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다만, 비판과 비난, 비하는 구별되어야 한다.

분위기를 깨는 사람을 뜻하는 영어 표현인 “party pooper”가 떠오른다. 누구나 생리적 욕구는 있을 수 있다. 다만, 사람이라면, 성인이라면, 그리고 지성인이라면, 자신의 욕구를 해결할 때와 장소를 가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작품을 먼저 읽어야 할까

“노벨상 수상 작품은 원어로 읽어야 제맛이지!” 라는 농담같은 자랑을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언제 또 우리에게 올까.

한강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어보진 못했다. 아마도 처음으로 읽었던 <채식주의자>의 날카로운 기억 때문이겠지.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쉬어야 할 만큼 힘이 들었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걱정으로 시작해 입에 음식을 짓이기는 가족들에게 차마 크게 소리치지도 못하고 “꿈을 꿨다.” 라고 읊조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영혜가 가여워서. 영혜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 상황이 너무 슬퍼서. 나도 모르게 그 장면 안에 떠밀려 들어간 것 같아서, 그런데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힘이 빠졌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쓰면서 많이 울었다고 고백한 인터뷰를 보고 나니, 영혜의 고통이 더 와 닿았다. 세 번쯤 읽고 나서도 잘 와닿지 않았던 마음의 거리가 좁혀진 기분이었다. 비로소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러나 이 책을 “한국 문학 작품을 추천 해 줘.” 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자신있게 권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자신이 없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로 부커상을 수상한 후,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가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노벨상 수상을 알리는 전화 인터뷰에서 “한강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작가라면 가장 취근작을 꼽게 마련이다 라 말하며 가장 최근에 나온 <작별하지 않는다>를 처음으로, 그리고 서사가 맞닿은 <소년이 온다>를 다음으로 언급한 뒤, 자전적 요소가 담긴 <흰>을 추천했다.

그녀의 인터뷰를 따라가보니 그 간의 고통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보여주기 위해 폭력의 장면을 그대로 그려낼 수 밖에 없었노라고, 말하던 인터뷰 화면 속 그녀의 표정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비극적 역사와 개인의 고통을 직시하며, 우리에게 잊으려 한 건 아니었냐는 질문을 넌지시 던진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라는 문장은 세월호를 잊으라 말하는 목소리를 멈추게 한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이유도 영문도 모른채 보내고, 그만하면 된 거 아니냐는 무심하고, 어쩌면 무책임한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 아니라고,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한강 작가의 작품이 ‘어렵다’는 평을 듣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심오한 어휘도, 복잡한 서사도 없는 작품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적확한 단어를 발견했다.


정서적 피로감


아, 이거였구나.


비극적 역사를 다루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그것을 잊고 덮으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록하는 것이다. 전자의 시각, ‘없었던 일’ 혹은 ‘슬 픈 일’ 정도로 해두고 ‘무브 온’ 하자는 미국을 지배하는 정서다.

여기서 더 나아간 시선도 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고 쳐, 근데 나는 그런 일에 가담하지 않았는데, 내가 왜 미안해해야 하지? 나는 가진 것도 없는데, 내 하얀 피부도, 남성이라는 것도 내게 어떠한 기득권을 주지 않았는데, 왜, 내가 갖지도 못한 걸 나눠야 하냐고.” 미국의 신우익을 끌어모으는데 큰 역할을 했던 내러티브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레퍼토리 아닌가.


해외 언론은 한강을 '주류(mainstream)가 아닌' 작가로 묘사하는데, 이는 한강의 작품이 폭력을 다루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한강의 작품에는 언제나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등장한다. 한국의 한 교육청에서 금서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웃음과 헛웃음이 번갈아 나온다. 읽어야 할 책, 읽지 말아야 할 책을 누가 정할 수 있는걸까.


한강의 작품 속 인물들은 잊혀진, 목소리도 이름도 없는 이들이다. 이들이 겪어야만 했던 일들을 치밀하고 꼼꼼하게 그려내는 한강의 작품들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는 연약한 개인을 드러낸다’는 노벨상 선정 이유로 요약되고, 한강의 작품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치에 대한 인정이라 생각한다.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것, 그것이 “인류에 공헌(To the greatest benefit to humankind)”한다는 노벨상의 취지에 어울리는 것 아닐까.


첫 한국 노벨문학상이 본인을 포함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작가에게 돌아가 다행이다. 그리고, 그 상을 받은 작가의 첫 반응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마당에 무슨 잔치냐.” 라며 기자회견을 하지 않겠다고, 축하 받을 자리를 마련하지 말라는 목소리여서, 너무나 고맙다.

전업 작가의 주수입원이 책 판매에 따른 인세가 아니라 강연인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목소리는 글로 표현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노벨상 수상 후 기자회견을 거부하며 "상을 받은 이유는 즐기기보다는 냉철해지라는 것"이라고 한 한강 작가의 메시지를 들으며 봉준호 감독과 윤여정 배우가 아카데미 수상 후 향후 계획에 대한 질문에 했던 말이 기억났다. 하던 일, 영화를 만들고, 연기를 하겠다는 두 사람과 “노벨상을 받은 이유는 즐기기보다는 냉철해지라는 것이다.” 라고 한 한강 작가는 결이 닿아있다.


12월 노벨상 수여식에서 발표될 수락 연설문을 쓸 한강 작가가 평소처럼 읽고, 쓰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면 좋겠다.

소설을 쓰는동안 너무 힘들어서 한 문장도 쓰지 못하고 내내 울다가다시 또 써내려 간 작가에게 어울리는 축하는, 작가의 글을, 또 작가의 글의 양분이 되었을 또 다른 글을 마음다해 읽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이 게재된 후 2개월만에 한국의 역사는 40여년 전으로 돌아갈 뻔 했다. 2025년 2월, 역사의 심판은 아직 진행중이다.


2021년부터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기고중인 글을 모았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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