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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e Kim Aug 31. 2022

필름 네 롤을 현상했다

그중에 반은 흐리거나, 잘렸거나, 가려졌다

내 첫 필름 카메라는 아빠가 어느 구석에서 찾아준 녀석이었다.

꽤나 무겁고 타이머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았지만 가족의 손을 타고 내게 왔다는 사실이 꽤나 낭만적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필름 감기는 소리가 우렁차게 카메라 본체를 울렸고,

카메라가 터지면 어떡하나 겁먹은 나는 새로운 카메라를 찾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내 손에 들어온 필름 카메라는 당근 마켓에서 오만 원에 데려온 아이였다.

저렴하게 상태 좋은 물건을 케이스까지 함께 건져 기뻤던 것도 잠시,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보니 필름 개수가 나오는 액정이 작동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속상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기능은 하니까 괜찮다며, 이때부터 흑백 필름을 넣어 찍어 다니기 시작했다.

결과물의 대부분은 흔들려 초점이 나가 있어 한번 더 속상해졌다.

두 번째로 넣은 필름은 현상소에 맡기니 미노광이라는, 필름에 상이 맺히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점점 비싸지는 필름을 망가진 카메라에 넣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온라인으로 필름 카메라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소중한 내 후지 필름카메라

세 번째이자, 당분간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데려온 새 필름 카메라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두 종류의 줌 세팅과, 단순한 디자인과, 적당한 크기의 본체.

이미 가지고 있던 카메라 케이스에 구겨 넣으면 어느 정도 들어가는 호환성이 좋았다.

독일 여행길에서는 후지 필름도 주문했고, 정말 마음껏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내가 사랑하던 프랑크푸르트의 조각들을 마음속에 담아오는데 카메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열심히 찍은 필름 네 롤을 현상소에 맡기고 나오며, 내 여름이 어떻게 스냅숏으로 정리되어 나타날지 기대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현상소에서 파일을 보내왔다.

맡긴 필름 네 롤 중에서, 한롤 반 정도는 좋은 사진들이 나왔다.

그리고 나머지 두롤 반은 도대체 이게 뭔지 모르겠는 흐린 사진들과 색들의 조합이었다.

내 마음에 드는 새 카메라로 내게 정말 소중했던 여행길의 사진을 찍은 결과가 이 정도였나 하는 생각에 잠시 허탈해졌다.

그리고 다시 현상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초점이 나가 있는 사진들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형체를 모르는 색들이 서로 묻어있는 사진들도 나름 예뻐 보였다.

그중에서도 잘 나온 사진들은 정말 멋졌다.

함부르크의 엘브필하모닉을 찍은 사진은 핸드폰과 패드의 배경화면으로 설정해뒀다.

올라퍼 아르날즈의 콘서트에서 눈물 줄줄 흘리던 내 모습을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기억이라는 것이 참 그렇다.

마음속으로 백장의 사진을 찍으면, 그중에서 삼분의 일 정도는 영원히 간직하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나머지는 망각이라는 축복 아래에 묻고 지나갈 수 있겠지.


여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길목에서, 나는 좋은 기억은 가져가고 나쁜 기억은 묻고 간다.

처음에는 날카롭고 힘들어 묻어둔 기억들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꺼내본다면,

당시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의외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이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있을 것이다.

초점이 나간 사진들은 다음번부터 사진을 찍을 때 손의 위치를 주의하라는 교훈을 남겨줬다.

내 왼손가락이 플래시를 가리고 있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잘 나온 사진들도 자세히 보니 양 끝에 햇빛처럼 강한 빛이 둥글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빛샘 현상이라고 부르더라.

현상실이라고 부르는 카메라 내부의 스펀지가 노후되어 빛샘 현상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카메라를 새로 장만한 지 삼 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하자가 생긴 것 같아 속상했다.

더군다나 아무 생각 없이 그 현상실이라는 공간을 보려고 카메라를 열었다가 멀쩡하고 비싼(!) 필름 한 롤을 통째로 날려 한 번 더 속상해졌다.


우울한 마음에 카메라를 구입한 곳에 하소연하면서 수리가 가능하냐는 문의를 남겼다.

이 카메라를 또 버려야 하는가 속상해하며 독일 디엠에서 싸게 산 흑백 필름을 넣었다.

속상한 만큼 흑백 사진이 내 심정을 반영해주길 바라면서 내 방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중에 필름을 현상하고 나면 이때의 이 감정도 별 것이 아니게 되겠지.

카메라를 구입한 업체에서는 내가 편할 때 수리를 접수해주겠다고 했다.

흑백 필름으로 정말 아무런 사진이나 막 찍어야지.

나중에 이 필름 중 하나라도 건지는 사진이 있으면 많이 기뻐할 수 있게.

그리고 한동안 속상한 마음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이 필름 카메라는 마음속에 넣어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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