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 가장 걱정되는 건 지금 글에 담는 생각들이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 하반기 동안 SF소설을 포함한 여러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도 그렇다. 세상은 선(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정답이라 여긴다. 하지만 선이 뭘까? 법만 지키면 선한 사람이 되는 걸까? 흔히 말하는 도덕적 규범까지 지키면 선한 사람일까?
김상욱 박사님은 한 방송에서 과학에는 100%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언제든 다른 연구 결과에 의해 뒤집히기도 변형되기도 한다는 의미였다. '예'와 '아니오' 명확 그 자체라고 생각했던 영역에서도 정답이 그리 쉽게 나오지 않는데, 그보다 복잡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완벽하게 선할 수 있을까. 각자의 이해관계와 살아온 배경에 따라 선으로 바라볼 수도 악으로 바라볼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XX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이 말을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명언이다. 선과 악은 명확하게 '여기까지는 선. 저기부터는 악'이라 나눌 수 없다. 그나마 잣대로 여겨지는 법과 규범 역시 필연적으로 완벽할 수 없다는 게 올해 생각한 바다.
이런 생각들은 타인과 세상에 기대하지 말자는 올해 초에 한 다짐을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바라지 말고 묵묵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하면서 최선을 다하자. 어쩔 수 없다. 뭘 탓할 필요도 억울할 필요도 없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된 거다. 결과가 안 좋으면? 거기부터 다시. 별 수 있나. 죽지 않을 거면 살아내야지.
그러면서도 이러한 삶에 대한 태도가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인간은 선한 존재라 믿었다. 인간은 본래 착해.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 온 마을의 힘이 필요한 것처럼 세상에 선을 향해 나아가면 인간은 계속 선하게 살 수 있어. 그리고 이게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그런데 몇 권의 책이 성인이 되고도 십 년 이상 안고 온,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를 완전히 뒤엎었다. 몇 번의 여행이 내 인생을 바꿨듯이 몇 권의 책이 시야를 바꿨다. 이 말은 앞으로 읽는 책 혹은 경험이 또 한 번 지금의 생각을 송두리째 뽑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도 있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나는 그릇된 사람이라 손가락질할 생각은 없다. 과거의 내가 있기에 생각이 바뀐 나도 있는 거다. 과거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 책을 읽었기에 지금의 생각을 갖게 된 거다. 책부터 시작이 아닌, 과거의 나부터 시작된 변화다. 이것 역시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가진 필연적인 변화의 단계가 아닐까.
이런 변화의 단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도 흔들리는 때가 있다면 글을 쓸 때다. 지금 쓰는 글에 담긴 나와 미래의 나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데 이 믿음 또한 의견 중 하나이기에 반대편에 서 있는 독자들에게 불편함이 될까 봐. 그리고 그런 불편함이 내 발목을 잡을까 봐. 어쩌면 미래의 내 발목까지도. 완벽하지도 않으면서 완벽하고 싶은 헛된 욕망은 '내글구려병'을 부른다. 아 이거 아니야. 이거 못 올려.
그러나 생각이 담기지 않는 글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을 토대로 쓰는 소설 등의 글조차도 작가의 모든 것이 투영되는데 어찌 나를 배제한 글을 쓰겠나. 설령 배제하는 글을 쓰는 것에 성공했다고 한들 독자도 인간인데 숨긴 것이 많은 글에 매력을 느낄까? 김영하 작가는 AI 기술이 등장했다고 해서 작가라는 직업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독자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읽고 있는 글이 100% 기계가 쓴 글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 글에 대한 정서적 거리감이 상대적으로 멀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갈팡질팡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할 때 사람은 힘들어진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걸 인정하고 용기를 내야 한다. 미움받더라도 누가 짖더라도 나아가는 용기. 때로는 들이받는 용기. '어쩔티비' 유행어를 중얼거리면서라도 써야 발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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