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국에서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뉴욕

by 뚜벅이는 윤슬
'뉴욕을 갈 돈과 시간이 없을 때, 여기를 오자!'
나리타공항에서 소화도 안 되고 머리도 어지러운 기분에 무인양품에서 산 아이보리색 배낭을 껴안고 고개를 숙이면서 생각했다. 체한 것 같다는 짐작이 드는 와중에도 이번 여행이 만족스러웠던 건 단순히 도시파 여행자에게 어울리는 촘촘한 도심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세 번째 방문인 만큼 도쿄가 얼마나 복잡한 도시인지는 안 가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행이 업이 된 이상, 한 도시를 여러 번 찾게 되는 건 필연이다. 도시뿐이랴. 그 속에서 가봤던 여행지를 또 가는 일도 생긴다. 안 가 본 나라가 더 많음에도 '재탕의 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다시 간다는 게 아쉬운 일은 아니다. 그 나라 그리고 도시에 대해 다 아는 날은 평생 오지 않을테니. 도쿄도 마찬가지였다. 미술관 또는 갤러리를 주제로 한 도쿄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도쿄에는 100곳 이상의 미술관과 갤러리가 있다. 신미술관 국립서양미술관 네즈미술관 등 다양한 시대와 종류의 미술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 또는 갤러리가 도시 곳곳에 있다. 다만, 숙박비도 항공권도 일본 타 도시에 비해 비싸서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와중에 출장의 기회가 찾아왔고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된 이상 활용해야 한다. 출장 시작일보다 3일 전에 도쿄로 떠나는 나름의 전략을 짰다.

그렇게 여행도 잡고 일도 잡는 덕업일치 여행이 시작됐다.


제주도에서 돌아오자마자 캐리어와 옷가지만 바꿔 다시 인천공항으로 향해 날아간 도쿄는 여전히 많은 인파로 최고치의 복잡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본에 이렇게 사람이 많나-싶을 정도로 지하철 역사 안에도 횡단보도에도 거리에도 사람들이 촘촘했다. 롯폰기의 유명 사거리 '롯폰기 스크램블'이 아니더라도 이미 도쿄의 모든 도로가 스크램블 같았다. 어딜 가나 사람들과 부딪힐 것 같았다. 대각선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직진하는 사람들. 가다가 유턴하는 사람들. 좌회전. 우회전. 각기 다른 걸음걸이가 에그 스크램블을 만들 때처럼 마구 뒤섞인다. 그 사이를 걷고 있으면 미니 게임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속도감이 있는 채로 장애물을 피하는 게임. 다리의 눈치가 빨라진다. 하루 종일 오전 8시 출근시간인 도시가 흥미로웠다. 나 이 게임 좀 좋아하는데? 그 속에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능숙한 기분이 들었던 건 N차 여행 + 도시파 여행자라는 캐릭터만의 능력치였다.

그렇지만 여행자도 항상 겸손해야 한다. 으쓱, 어깨가 올라갈 찰나에 누군가 어깨를 짓누른다.

일본은 현금만 받는 곳이 여전히 많다. 비상금 정도의 환전만 했더니 이틀만에 현금을 다 쓰고 ATM기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엔화 특히 동전과 익숙해지려면 아직 멀었다. 계산대 앞에서 바로 정확한 잔돈을 내는 게 여전히 어려웠다. 한번은 계산을 틀려서 직원분께 알아서 가져가달라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 이건 동전의 문제가 아니라 산수의 문제인가. 한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엔화를 동전 사이즈별로 정리할 수 있는 동전 케이스를 주문하리라 다짐하면서 동전을 어렵사리 없앴다.


우물처럼 퍼내도 계속 생기는 동전을 달그락거리면서 미술관을 틈틈히 다녔다.

이전에 갔다가 상설전에 반했던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을 다시 찾아갔다. 우에노 공원 안에 있어 가는 길부터 분위기가 활기찬 게 마음에 드는 곳이다. 피크닉을 온 것 같은 가벼운 기분으로 가로수길을 지나 미술관으로 향했다.

도시뿐만 아니라 미술관도 다 알 수 없다. 지난 번에 본 작품에 추가로 새로 걸린 작품이 여러 점 있었다. 'New Opening'이라는 팻말이 있는 작품을 볼 때면 마음이 벅차올랐다. 새로운 작품을 실제로 보는 건 언제나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인생 명화 중 하나인 모네의 수련는 볼 때마다 아름다움의 극치다. 입체적인 붓터치가 연못을 상상하게 한다. 다음 파리에서는 꼭 지베르니를 가봐야지. 또 한번 머릿속에 메모한다. 화창한 계절에 파리 여행 가기.이번 전시에서는 작품이 걸려 있었던 액자를 어떻게 보존하는지와 다른 도시 또는 나라에 작품을 대여해줄 때 어떤 심의를 거치는지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자료들도 볼 수 있었다. 매번 작품에 대한 해석에만 집중했는데 액자 또한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실제로 이 날 이후로 미술전을 갈 때마다 액자도 유심히 보고 있다.). 액자 보존 과정에 있어 이해를 돕는 실제 작업 도구들 또한 전시되어 있었는데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됐다. 앞으로는 여러 각도에서 미술을 바라보리라 생각하면서 긴 시간을 미술관 안에서 보냈다.

전시 관람에 있어 식후 디저트는 굿즈샵이라고 생각한다. 고민하다가 물에 비친 배의 반영이 아름다워 시선을 한동안 두었던 모네의 <On the boat> 작품 포스터를 구입했다. 전시 관람의 기승전결이 완벽했다.

우에노역 편의점에서 밀크티와 오니기리를 구입해 미술관 근처 벤치에 앉아 먹은 시간은 정말 피크닉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신미술관도 드디어 가봤다. 일본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일본 작가들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충격적인 방식으로 만든 작품들이 많아서 흥미로웠으나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하는 수 없이 제멋대로 해석하면서 봤다. 미술을 좀 더 자유롭게 감상하려면 다방면의 지식이 필요하다. 부지런히 호기심을 갖고 다 흡수해야지, 배움의 필요성을 느낀 전시였다.

신미술관은 미술관 건물 자체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특한 걸로 유명한데, 막상 갔을 때는 밖에서 본 야경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해가 모두 진 저녁, 미술관 내부의 주황색 빛이 투명한 건물 외벽을 뚫고 존재감을 발산하면서 걸어다니는 사람들과 나무들이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 장면이 사진전에 걸려 있는 멋드러진 사진 작품으로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작품이었던 미술관 그 자체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유독 일본의 창의력에 호기심을 갖기도 했다.

여행 중 일본 캐릭터 상품을 다루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이케부쿠로를 갔다.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산업이 탄탄하게 자리잡은 일본의 모습을 요약해서 볼 수 있는 동네다. 없는 캐릭터가 없고 평소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법한 코디와 메이크업을 한 일본인들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캐릭터 상품들을 보면서 '이런 상품도 만들 수 있구나' 영감을 얻기도 했지만, 규율과 절차가 효율보다 중요한 나라의 반전이 신기했다.

아직도 종이로 결재를 받는 회사가 허다하고 정장을 입고 일하는 일본인의 창의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틀 안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에 능숙한 걸까?

일본인들로 가득했던 캐릭터 굿즈 편집샵을 둘러볼 때는 공급과 수요가 모두 풍부하기 때문에 이 산업이 커질 수 있었던 걸까 추측하기도 했다. 일본은 예술가를 장인으로 대우하기 때문에 업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캐릭터 산업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하면서 이케부쿠로 거리를 걸었다.


출장 반 여행 반 감상은 많이. 이번 여행을 하면서 도쿄가 뉴욕과 많이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미술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뉴욕 미술관. 분야도 그 수도 다양했던 각양각색의 브랜드 매장들. 동적인 일상을 보내게 하는 활기찬 도시 분위기. '살아남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바쁜 곳이지만, 그 만큼 많은 것을 짧은 시간 안에 얻을 수 있는 곳. 성장에 대한 욕구를 들끓게 하는 추진력과 동기부여의 도시다.

특히 창작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 도쿄는 뉴욕만큼이나 도전 의식을 갖게 하는 곳이다. 자신의 창의성과 정교한 기술력을 알리고 싶은 예술가 혹은 사업가들의 결과물이 즐비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맛 때문에 뉴욕에 반했듯이, 도쿄에서도 같은 맛이 난다는 걸 알자마자 더 사랑하게 됐다.

역시 같은 도시 여행을 여러 차례 거듭해도 그 도시에 대해 다 아는 날은 오지 않는다.

네 번째 도쿄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 신주쿠역에서 충전식 교통카드인 스이카를 구입했다.


_DSC1365.jpg
_DSC1401.jpg
_DSC1403.jpg
_DSC9402.jpg
_DSC1206.jpg
20250917_175914.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