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예 Dec 31. 2018

그때 그 사람은 무엇을 봤던 걸까

06 카뉴쉬르메르, 르누아르 미술관 Musée Renoir

스마트폰이 제대로 전파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지도 어플이 무용지물이 되면서 대혼란에 빠졌다. 더듬더듬 표지판을 보면서 순전히 감에 의존하여 간신히 카뉴쉬르메르의 오트 드 카뉴(Haut de Cagnes)를 찾아갔다. '이게 길이야?'를 수도 없이 외치며 일방통행길과 좁은 골목, 언덕을 겨우겨우 지나 산자락에 위치한 오트 드 카뉴 도착. 아마 다시 찾아가라고 해도 똑같은 길로는 절대 못찾아갈거다.


에즈가 세련되면서도 상업적인 느낌이었다면 이 곳은 투박하지만 아직은 상업적인 때가 덜 탄 모습이었다. 중세 시대로의 시간 여행을 온 것만 같은, 아주아주 옛날 분위기의 작은 마을. 이런 표현은 정말 식상하지만, 달리 신박하게 표현할 방법도 없는 것 같다.


관광 안내소에 들러 마을 지도를 받고나서야 지도 어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유유 자적 걸었다. 지도 어플 대신 종이 지도를 끼고 낯선 동네를 걸어본 것도 참으로 오랜만인 듯 하다. 부슬비가 오락가락하는 통에 하늘의 빛깔은 온통 회색빛이었지만 그럼에도 여기 풍경은 모두 마음에 들어 감히 사진을 추려낼 수가 없을 정도다.


카뉴쉬르메르는 크게 구시가지인 오트 드 카뉴와 항구 근처의 크로 드 카뉴(Cros de Cagnes), 그리고 호텔과 상점 등이 밀집되어 다운타운으로 불리는 카뉴 빌(Centre ville)로 구분해볼 수 있다. 르누아르의 집은 카뉴 빌 지역에 남아있다.


# 르누아르 미술관 Musée Renoir

이 곳은 르누아르가 실제로 말년에 거주했던 집이다. 이 곳에 살 당시 그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성공한 위치였지만 심각한 류머티스 관절염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관절염이란 습기에 취약하니 요양차 날씨 좋고 볕 좋은 이 곳으로 옮겨왔다는 사연이 전해지는데 하필이면 이 날은 그런 사연들이 무색할 정도로 계속해서 부슬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이었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절염은 점점 심해져 나중엔 손으로 붓을 쥘 수조차 없을 지경이 되자 손에 붓을 꽁꽁 묶은 채 그림을 그렸다는 르누아르. 때문에 그림의 섬세한 맛은 이전에 비해 다소 떨어졌지만, 그래도 르누아르는 르누아르다. 그렇게 그는 이 집에서 800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르누아르는 풍경화도 다수 제작하였지만 주로 여인의 신체에서 베어나오는 매력을 표현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특히 색채 표현에 능한 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인물의 피부를 표현할 때도 단순히 베이지나 살구색 계통의 색만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갈색 등 다양한 색채를 활용했다. 이런 색채 조합 덕분인지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은 특유의 부드러움과 함께 왠지 모를 오묘한 느낌을 풍긴다. 노랗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양 무척이나 따스한 느낌도 든다. 


이 집에는 그가 그렸다는 그림들 외에도 손 때가 묻은 이젤, 물감 묻은 파레트, 그의 발이 되어주었던 휠체어 등이 보관되어있는데 나는 그런 것들보다는 자꾸만 창 밖 풍경에 더 눈이 갔다. 아무리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들, 건강한 사람보다야 거동이 불편했을테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없었을테고 대신 휠체어에 앉아서 열심히 창 밖을 내다보았겠지 싶었다. 그때 그 사람은 무엇을 봤던 걸까. 무엇을 보았기에 그 아픈 몸으로 이리도 따뜻한 그림들을 그릴 수 있었을까.


사실 이곳에 11시 40분 쯤 도착했는데 직원들 점심 시간 때문에 오전 관람은 11시 30분까지만 입장이 가능하다며 입장권 판매를 친절하게, 하지만 아주 단호하게 거부당했다. 오후 2시부터 오후 관람 입장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근처에 시간 때울 곳도 마땅찮기에 '그럼 차라리 주차장에서 죽치고 기다릴까' 했더니만 직원들은 서둘러 주차장에 있는 모든 차를 다 내보내고 철문까지 걸어 잠근다. 그 철저한 모습에 새삼 놀라고, 계산을 해보니 점심 시간이 무려 2시간이 넘는다는 점에 또 한번 놀라버렸다. 사람이 먹고 사는 모습이 다 그게 그거 같으면서도 가끔은 너무 다르게 먹고 사는 것 같아 놀랍기도 하다. 의도치 않게 이런 차이들을 깨닫는 것이 여행의 매력 중 하나인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이전 05화 이토록 작위적인 세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