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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Feb 04. 2019

아를은 고흐의 도시가 아니다

11 아를, 반 고흐의 발자취

엑상 프로방스가 세잔의 도시이듯 아를은 고흐의 도시일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약간의 오산이었다. 아를은 고흐의 도시라기보단 고대 로마 유적이 넘쳐나는 문화 유산의 도시였다. 이 곳이 이탈리아가 아니라 프랑스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 아를은 초기에는 서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였다가, 이슬람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가, 훨씬 이후에 프랑스 영토가 된 곳이라 이런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한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 내용들을 역사책에 나오는 한줄 텍스트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아를에서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다. 골목 모퉁이를 돌 때마다 튀어나오는 고대 극장과 아레나, 그리고 광장 한 켠에 위치한 생 트로핌 석조 성당을 둘러보느라 결국 고흐를 깜빡 잊고야 말았다.


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로마 유적들은 대개 기원전 1~3세기 경에 세워진 것들이라 워낙 오래되어서인지 보존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황폐화된 모습 그 자체에서 그간 통과해온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대 극장의 훼손이 심했는데, 그건 이 곳의 대리석을 떼어다가 각종 건축 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레나의 경우는 그래도 어느 정도 복원 작업이 진행된 덕분에 상태가 괜찮은 편이라 오페라 축제와 투우 축제 등이 열릴 때는 여전히 공연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있다고 하는데 이 날은 텅 비어 적적한 모습에 군데군데 고양이들만 볕을 쬐고 있었다. 이 곳은 고흐가 작품의 소재로 삼기도 했던 곳이어서 고흐 작품 속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볼 수도 있다.  


세잔이 엑상 프로방스에서 나고 자라고 생을 마감했다면 고흐는 고작 15개월을 아를에 머물렀을 뿐이고(하지만 그 15개월 동안 200여점의 작품을 그렸다는 점이 놀랍다), 세잔에게 엑상 프로방스가 파리에서 받은 괄시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심리적 안정을 되찾게 해준 일종의 안식처였다면 고흐에게 아를은 고갱과의 격한 감정 다툼으로 귀까지 자르며 광기를 폭발시킨 곳이니 좀 다른 관계로 봐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고흐는 네덜란드 사람으로 프랑스 사람도 아닌 이방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를은 고흐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로마의 영광이 사라진 자리엔 고흐와 관련된 기념품들이 가득했다. 아레나 외에도 고흐의 작품 속 배경이 된 곳들을 여럿 만날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역시 <밤의 카페 테라스>를 쏙 빼닮은 <카페 반 고흐>. 고흐의 트레이트 마크인 강렬한 노란 빛으로 칠해진 카페는 아를의 명물이 됐다. 낮에도 방문해 보고 밤에도 방문해 보았는데 역시 밤의 모습이 더 매력적이다.


고흐 작품은 보통 '강렬한 색채', 특히 그 중에서도 '선명한 노란 빛'으로 통한다. 그 말도 물론 맞는 말이지만 실제로 고흐 작품을 보게 되면 이런 작품을 평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한 입체감이 느껴진다. 그건 고흐가 치밀한 명암 표현으로 양감을 화면에 잘 표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화폭에 물감을 엄청나게 두껍게 덧칠했기 때문이다. 일반 회화와는 다른 중량감과 두께감 위로 붓이 움직인 흔적 또한 선명하게 드려나있어 그가 얼마나 힘을 주어 붓을 놀렸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말 그대로 온 힘을 다한 정열적인 붓질. 그림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지만, 아무도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인정해주지 않는 현실과 그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외로움을 끌어안은 채 캔버스 위를 울부짖듯 붓으로 휘저었을 그의 모습이 떠올라 다시금 안쓰럽다.


고흐의 작품 속에 등장한 곳 중 가볼만 한 곳을 하나 더 꼽자면 에스파흐 반 고흐를 추천하고 싶다. 에스파흐 반 고흐는 고흐가 당시 정신병 치료를 받았던 요양원인데 고흐의 작품 <아를 요양원의 정원>을 바탕으로 그 시절의 모습대로 복원해두었다고 한다. 덕분에 겉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지만 지금은 요양원이 아니라 종합 문화 센터로 활용 중이다.


앞서 아를은 고흐의 도시가 아니라고 단언했지만 여기까지 적고보니 역시 아를 이야기를 하면서 고흐를 뺄 수는 없을 것 같다. 한 도시를 상징하는 인물이 된 남자. 그것이 처절한 생을 힘겹게 마치고 난 후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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