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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Jul 15. 2018

이런 언니가 되고 싶었지만

나는 과연 어떤 선배였을까?

한참 동안 재미있게 본 미국 드라마가 있다. <볼드 타입 (The Bold Type)>이라는  작품으로, 2017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시즌을 이어가며 방영하고 있다. <볼드 타입>의 주인공은 '스칼렛'이라는 세계적인 여성 잡지에서 일하는 세 명의 젊은 여성이다.      


드라마의 주요 배경이 되는 여성 잡지사는 대중의 기호를 읽고 이목을 붙잡기 위해 매일같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공간이다. 살벌하지만 매력적인 직장이다. 사회초년생으로 잡지사 일을 함께 시작하며 절친이 된 주인공들은 매회 자신의 일과 사랑에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고, 그때마다 서로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눈다.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직장에서 저렇게 믿을 수 있고 무한한 지지를 보내주는 친구를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하나, 드라마 속 상황이나 주인공들에게 부러운 점이 있다. 잡지사 '스칼렛'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편집장 재클린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주인공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조언을 구하는 선배이자 어른이기도 하다. 매 에피소드에서 재클린은 주인공들에게 훈계나 가르침을 주기보다는, 후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정해진 대답을 주지 않고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셈이다.     


재클린의 매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늘 완벽한 일처리, 행복한 가정생활을 보여주며 후배들의 롤모델로 불리지만, 후배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는 그녀 역시 실수하거나 상처 받았던 지난날이 있음을 고백한다. 잡지 콘텐츠 전체를 책임지는 편집장으로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막내 직원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용기도 지녔다. 다가설 수 없는 완벽한 상사가 되기보다는 동료 의식을 느끼게 하는 선배다.      


재클린은 잡지사가 주최한 파티에서 후배들을 향해 이런 연설을 한다. "'스칼렛'은 소녀들에게 늘 '언니(older sister)'가 되어 줄 것이고, 우리는 '스칼렛'을 필요로 하는 소녀들을 위해 일할 것이다"라고. 그러니 더 많은 실수를 하고, 모험을 하고, 마음껏 사랑을 하고, 거대한 지옥을 경험하는 일도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한다.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그야말로 이상적인 편집장이자 어른이 아닌가! 방송 현장에서 일하며 나도 이런 언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방송국을 떠났다.      


우선, 내 밥벌이에 급급해 후배들에게 곁을 내줄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참신한 아이템이 없다며, 섭외가 안 된다며, 원고가 잘 써지지 않는다며 나 스스로를 그리고 후배들을 달달 볶으며 팍팍한 일상을 살았다. 늘 미간에 주름을 짓고 살던 나에게 후배들이 자신의 고민을 말하고, 조언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막 방송일을 시작한 자료조사나 막내작가들에게 닮고 싶은 선배였는지도 미지수다. 방송 현장에 있으며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라는 말이 사치처럼 들렸다. 집에 와서도, 심지어는 꿈에서도 다음 방송 걱정을 했다. 방송 일을 한다는 핑계로 주위 사람들에게 소홀히 대하고 '저녁 있는 삶'은 꿈도 꿀 수 없었던 나의 20대, 30대가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가장 자신이 없는 부분은 후배들 혹은 동료들에게 나의 치부를 보여주는 용기를 발휘했던가 하는 지점이다. 분명 방송 일을 하며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경험했다. 그럴 때마다 내 잘못을 정확히 인지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진심을 담은 사과를 하기보다는, 나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며 변명거리를 찾기에 바빴다.     


이렇게 결점 투성이 선배였는데도 지금까지 나를 '언니'라 부르며 곁에 있는 후배들이 있다. 방송 작가로 만났으나 세월이 흘러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로, 영어 공부방 선생님으로, 파워 블로거이자 프로 주부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생들이다. 이제는 방송국을 떠난 그녀들이지만, 일분일초를 다투던 방송 현장에서 낮과 밤을 같이 보낸 우리들에겐 전우애 비슷한 것이 생겼고, 이제는 속내를 털어놓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만날 때마다 방송작가로 살면서 힘든 점도 많았지만 얻은 것 또한 많았다며 서로를 토닥이곤 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한다. 아직 나에겐 '멋진 언니'가 될 기회가 남았다고. 과거에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방송작가 생활의 고충과 글쓰기의 고단함을 오늘, 조금 멀리 떨어진 이 자리에서 알아봐 주면 되지 않을까.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며 그들의 곁에서 친근하고 솔직하게 공감과 위로의 말을 건네면 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중이다. 


<볼드 타입>의 등장인물들. 맨 우측이 ‘멋진 언니이자 선배’인 재클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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