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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숙 Apr 25. 2018

물건들을 위한 물건 '수납용품'

버리는 것이 물건만이 아니며, 남겨두는 것도 물건만이 아니다.

tvN 프로그램 "숲속의 작은집' 장면


수납을 위한 건 의자 겸용 박스 2개와 음식을 보관할 아이스박스뿐이었다.

최근 tvn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그램 '숲속의 작은집' 모습이다.


off grid(에너지 독립형)를 추구하는 이 프로그램은 전기, 수도, 난방 같은 현대사회의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 시스템 없이 최소한의 물건들로만 채워진 외딴 숲 속 작은집이 그 배경이다.

매트리스로만 꾸며진 잠자는 곳과, 딱 1인용 식기만 놓인 작은 부엌, 탁자와 의자 그리고 난방용으로 활용되는 화목난로가 놓여 있다. (노트북이나 휴대폰, 간이용 가스레인지는 프로그램의 진의를 의심하게 하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출연하는 배우들은 자신이 가지고 온 음식과 옷가지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집 안에 준비되어 있는 물건들을 사용해야 하며 제작진이 요구하는 미션(새소리를 녹음하거나 밥을 3시간 동안 먹어야 한다거나)을 수행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체험해 보는 프로그램이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모든 것들(소음, 속도, 복잡함, 관계 등)로부터 고립을 자처하고, 작더라도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 집중하며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삶의 방식이다.




삶을 보다 더 담백하고 단순하게 살기를 결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누군가에겐 그들이 지나치게 많은 물건을 버리고, 집을 극단적으로 텅 빈 공간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단순히 정리정돈을 잘해서 프로 살림꾼이 되고자 하는 열망에 의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버리는 것은 다만 물건만은 아닐 것이며,
그들이 남겨두는 것도 다만 물건만은 아닐 것이다.





일본에서 미니멀리즘, 미니멀 라이프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 시작한 계기가 동일본 대지진 이후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한순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사랑하는 사람도 함께)이 물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을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더 많은 물건과 관계를 소유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사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행복은 살아가는 방식 즉, 진정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생활방식(=라이프스타일)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실천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이해하게 된 듯했다.



미니멀리스트들의 삶에서 물건은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더 잘 영위하기 위한 목적 외에는 의미가 없다.

그들의 집에 물건이 극단적으로 적어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분히 편안한 일상을 영위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며, 오히려 쓸모없는 물건들이 그들의 행복을 해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수납 시스템의 패러독스

물건을 수납하는 물건이라는 것은 유쾌한 패러독스의 산실이다.
온갖 물건을 소유하는 편의를 누리게 해줄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물건을 치워두기 때문에 정작 그 물건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꿩 먹고, 동시에 알은 치워버릴 수 있게 한다.

물건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착각을 부추기는 가정용 수납함은 진짜 무산자들의 삶을 상징하는 물질을 그 재료로 쓴다.
지난 시즌 동안 홀드 에브리싱은 '대나무와 라탄을 쪼개어 엮어 만든' 뱀부 펜스를 출시했다. 올해는 계단식 논으로 유명한 필리핀 지역의 이름을 딴 하파오 고리버들 세공품을 내놓았다.
[책 '굿바이 쇼핑' - 주디스 러바인]


물건을 위한 물건 '수납용품'

수납가구나 수납용품은 다른 물건들을 '정돈'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물건이다.

물건들을 사용하기 편하게 정돈하고 집 안을 정갈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수납용품의 함정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과 그 양을 교묘하게 숨겨준다. 

수납시스템이 잘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수납에 재능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그러하다.

정리, 정돈을 잘하는 것과 많은 물건들을 테트리스하듯 잘 쌓아놓는 건 다른 의미의 행동이다.



집안에 물건이 많을수록 더 많은 수납용품을 필요로 한다.

물건이 차지하는 공간을 줄이기 위해 잘 설계된 수납용품을 이용하지만 당연히 수납용품도 집안의 공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수납용품이 많다는 것은 자주, 당장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많다는 의미다.

공간도 낭비되지만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면 안심하고 물건을 아껴 쓰지 않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같은 물건을 하나만 가지고 있을 때와 여분의 것을 많이 가지고 있을 때 물건을 대하는 자세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물건이 늘어나 집 안이 복잡해졌다고 느낄 때, 그래서 마음과 일상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느껴질 때,

수납용품을 늘려 정돈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나에게 불필요한 물건들을 '정리'(불필요한 것을 줄이거나 없애는 것)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정리를 잘하면 많은 수납용품도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고, 수납용품에 숨겨둔 물건들에 공간과 시간, 돈을 낭비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이전보다 더욱 쾌적해진 공간은 길어야 며칠간의 행복만을 주었던 물건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지속적으로 삶의 질을 높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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