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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reeO May 01. 2018

역사의 증거

늙음으로 돌아보는 생

늙은 동물의 모습은 어떨까. 피부색만 달라도 나이를 알아채기 힘든 우리인데, 아예 모습이 다른 종의 동물의 늙음을 계산할 수 있을까.

최근 '당신이 모를수도 있는 늙은 동물 이야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은적이 있다. 그 기사에서는 아이사 레스코라는 미국 사진작가를 다루고 있었다. 작가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죽음이 머지않은 어머니를 1년 남짓 돌보며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늙은 동물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 기사에서는 이미 10대 중 후반에 가까운, 다양한 늙은 동물들의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는데, 동물들의 짧은 수명에 비추어 본다면 영정사진이나 마찬가지일테다. 실제로 대부분은 사진을 찍은 후 얼마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굳이 나이가 적힌 각주를 읽지 않아도 세월의 흔적을 금새 알아챌 수 있었다.
묘하게 지친 표정과 흐려진 눈빛, 탄력과 윤기를 잃은 피부와 털. 시간은 종을 가리지 않고 동일한 늙음을 선사하는지, 아니면  죽음 앞에서는 모든것이 평등하다는 증거인지, 인간과 다른 종이라도 그들이 지내온 세월을 짐작하는 방법은 별 차이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나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늙은 수탉의 사진이었다.



작가의 사진이 특별한 점 중 하나가, 반려동물 뿐 아니라 공장식 축산 시스템 속의 동물들 또한 촬영의 대상이기 때문인데, 과연 그 말 대로 다른 반려동물들의 사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별다른 묘사도 필요 없었다. 단숨에 늙음의 모습을 보여준 그 사진은 내가 쉽게 떠올렸던 수탉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좁아터진 철제 케이지 속에 갖혀, 공산품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꼬꼬거리는 닭들. 수없이 접했지만 그만큼 무감흥했었다. 하지만 한 장의 흑백사진 속, 지친 눈빛의 노계는 나를 무미건조함에서 순식간에 끄집어내 시스템 아래 매몰된 살아있는 생명 앞에 마주세웠다.

내가 상품처럼 무미건조하게 바라봤던, 그 시선이 당연했던 대상이라도 사실은 태어나 늙고 죽어가는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어떤 매체보다 선명하게 내게 알려줬다.
그 수탉의 뒷일은 알지못한다. 육계로도 쓰이지 못할 늙은 수탉이니 매장을 당했는지, 분쇄기에 들어가 사료나 비료로 바뀌어버렸는지.

그래도 그 수탉은 운이 좋은 편이다. 축산학적으로 최적화된 수명을 책정받아, 정량의 무게를 채우면 위생적이고 체계적으로 세상을 떠나는 육계들은 늙음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을테니.

이렇게 가끔 다른 생명의 시간을 체감하는 일은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든다. 단순히 그 종에 속하는 '무언가'에서, 살아 숨쉬며 수많은 밤과 낮을 지나보낸, 하나의 유일무이한 생명으로 탈바꿈한다. 그 태어남과 죽음의 역사를 늙음에서 발견하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큰 의미의 행동으로.

그래서 나는 좀 더 늙음을 눈여겨 보기로 했다.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길거나 짧은, 평온하거나 격렬했거나, 아무튼 그렇게나 많은 역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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