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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reeO May 06. 2018

단식의 추억

정신의 배고픔을 위해

나는 일주일간 물과 소금만으로 끼니를 때워 본 적이 있다. 그렇다. 흔히들 말하는 단식이다. 아마 대학교 신입생 시절의 일로 기억한다. 자의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흔히 체험하기 힘든, 색다른 경험으로 기억속에 남아있다.

계기는 단순히 심하게 탈이 났을 뿐인 일이었다.  2~3일정도 틈만나면 화장실을 왔다갔다하고, 장이 뒤틀리는 느낌과 구토로, 자연스레 식사를 거르게되었다. 이유는 생각이 잘 안나지만 아마 식중독이지 않을까 싶다.

심하게 배탈이 난 경우 할 수 있는 일은 약을 먹거나  식사를 거르고, 병원을 다녀오는 정도 외에는 없었다. 당분간 굶어야겠다는 결심을 할 때만 해도, 그렇게까지 단식을 오래 끌 계획은 아니었다.

뭔가 먹을만한 상태가 되면 뭐든간에 비어버린 위장에 채워넣을 터였다. 밥을 먹은지 오래됐다, 배가 고프다 하면 보통 그런 생각을 하는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 시점에 내가 몰랐던 건, 식사를 3일정도 안 하게 되면 오히려 식욕이 사라지고 장이 무감각해진다는 거다. 처음엔 남이 먹는 식사나 음식냄새가 식욕을 돋궈 밥을 먹게 만들까봐 식사 자리를 피하곤 했다. 어정쩡하게 나은채로 또 그런 속병을 겪고 싶진 않았으니까.

대신 식사 시간 즈음이 되면 손등에 뿌린 소금 조금을 핥아먹고-나트륨 공급이 없이 물만 마시게 되면 몸 속 전해질 균형이 깨져 신체 대사에 영향을 준다-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 내가 사흘간 한 일의 전부다.

처음 하루 이틀간은 미친듯이 배가 고팠지만, 그런식으로 몇 끼를 물과 소금으로 건너뛰고 나자 이게 웬걸. 굳이 피하지 않아도 음식 냄새나 모습이 식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게 됐다.

물론 칼로리 공급이 없으니 전체적으로 몸에 기운이 없는 편이고, 언젠가 음식을 먹어야한다는 건 생각하고 있었지만, 딱히 식사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기세를 탄 때가 아니면, 언제 또 제대로 된 단식을 해보겠나 싶어 이후로 내리 나흘, 그러니까 총 일주일을 굶게됐다. 당시 나는 대외적으로 활동이 많은 편도 아니었고, 갓 입학한 신입생 답게 학교공부에도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충분히 여건이 갖춰졌다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일주일간 단식을 하다 보면 굉장히 색다른 기분이든다. 많은 종교에서 단식을 수행의 수단으로 삼는 이유를 잘 알 수 있을 만큼.
사실 나도 여러 종교에서 틈만나면 단식을 해대는데, 그냥 끼니 굶는게 왜 종교적 수행과 상관이 있나 궁금히 생각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경험은 알지 못했던 부분을 보여준다.

먼저 노곤함과 더불어 정신이 맑아진다. 배가 고파 기운이 없는 만큼 쓸데없는 곳에 체력소모를 줄이기 위해서인지, 배고픔에 시달리던 예민한 시기를 넘기면 평소보다 심리적으로 훨씬 잔잔(?)한 상태가 된다. 또한 자의적으로 시작한 단식인 만큼,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스트레스도 적다. 못 먹는게 아니라 안 먹는거니까.

그리고 하루의 길이가 굉장히 길어진다. 우리가 하루 중에서 사용하는 식사시간의 비중은 의외로 크다. 혼자 가볍게 먹는 식사는 이삼십분이면 충분하다지만, 식사에 대해 생각하고, 먹을거리를 선정하고, 장소와 주문, 혹은 조리, 섭취에 걸리는 시간까지 더하면 꽤나 긴 시간을 잡아먹는다.


이처럼 식사는 의외로 굉장히 복잡한 의사결정과 정신적 자원을 소모하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일을 하루 두 세차례씩 매일, 꾸준히 행하고 있으니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자원은 만만치 않다.
그리고 어디 식사만 하면 끝인가 하니 그건 또 아니라서, 밥을 먹는 동안 풀어진 정신을 추스르느라 커피를 마시거나, 아니면 식곤증에 꾸벅거리거나, 어떻게든 이런저런 여유를 부리게 되는거다.


이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소금 약간과 물을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바꿔버렸으니, 얼마나 하루가 길어지는지 알만하지 않을까?

이렇게 일주일 정도 지내고 나니, 아예 음식을 안 먹고 살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이 슬슬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구나 싶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자면, 단식이란 행위는 생물이란 틀을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의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갈망의 형태같기도 하다. 하루 두세번 꼭 공급해줘야하는, 생명 유지의 필수요소들을 떨쳐버리고 자유롭고자 하는.

존재와 지성의 유지를 위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을 초월한 어떤 존재. 이를테면 신같은 뭔가로 말이다.
그렇다면 단식이 종교적 수행의 수단으로 널리 쓰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 했다.

물론 나의 단식은 그렇게 거창한 이유로 시작되지 않았고, 마무리도 그저그랬다. 아는 교회사람이 한턱 쏜 캐주얼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일주일간의 공복 후 내 첫끼였으니까.
그리고 몇 시간 만에 또 탈이났다는 건 비밀아닌 비밀.

어쨌든 그 뒤로 시간이 꽤 지나면서, 지금은 작은 해프닝 정도로 떠올리지만. 이제 영영 할 일이 없을테니 꽤나 인상깊게 기억되는건 사실이다. 나이가 들 수록 알게되는건, 누군가와 음식을 먹는 행위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고,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면 절대로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라서.

뭐, 맛있는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고, 삶의 기쁨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식사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기에 단식과 배고픔은 하나의 일탈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단식에 대해 얼마든지 다른 형태의 배고픔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인간을 넘어 다른 뭔가가 되고자하는 과정으로. 몸의 허기를을 양식 삼아 영혼의 굶주림을 채우고자 하는, 더 높은 차원의 배고픔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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