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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의 배와 경복궁

<미키 17>

by 랄라


미래의 인류는 우주 개척을 위해 개척선을 꾸준히 내보낸다. 새로운 행성에 '익스펜더블'이라 불리는 실험인간을 먼저 내려놓고 개척지가 인류에게 위험하진 않은지 여러 위험성을 사전 테스트한다. 익스펜더블은 한 인간의 생체정보와 기억을 그대로 백업했다가 사망 시 새로 프린트하여 그 사람을 다시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동의한 사람이다. 하지만 죽을 때 느끼는 공포와 고통은 고스란히 느낀다. 익스펜더블의 삶은 대부분 인생이 코너에 몰려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함께하는 가족이 없는 사람들이 선택한다.


이것이 2022년에 출간된 <미키 7>의 세계관인데 나는 이 세계관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이 너무 재미있어서 책도 잘 안 읽는 한 인류와 한참 토론을 했던 것 같다.


1. 어디까지가 나인가? 나의 몸은 내가 아닌가? 오늘의 내가 죽고 나와 똑같이 프린트된 몸에 내 기억과 사고방식을 이식하면 그건 100% 오늘의 나와 같은 나일까? '테세우스의 배'라는 것이 있다. 미노타우루스를 죽인 영웅 테세우스의 배. 배를 보존하기 위해 배의 여러 부품 나무가 썩을 때마다 새로 판자를 대며 배를 보존하는데, 이것이 아주 오랜 시간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테세우스가 타고 있었던 원래 배의 부품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이 배가 모두 교체되는 부품으로 바뀌는 순간, 이 배는 새 배인가? 원래의 배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경복궁인가) 그것을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지만 미키 7의 경우, 인간을 이루는 것은 기억이 맞지 않은가? 인간의 모든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매일 새로 생겼다가 죽는 주기를 거치지만 나는 여전히 나잖아. 그렇다면 한 존재의 본질을 정의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기억의 연속성'이 맞지 않는가?

-하지만 종종 나는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와 아예 다른 인류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기억은 연속돼도 가치관은 점차 바뀌잖아? 점점 부품이 교체되어 새것이 되는 테세우스의 배처럼.


2. 오늘 죽는 사람이 내일, 어제 죽은 사람 1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오늘 죽는 건 큰일이 아닌 게 맞는 건가? 내일 그 사람을 그대로 재창조해낼 수 있다면 오늘 이 생명은 소중한 게 아닌 게 맞는가? 그렇다면, 생명이 소중한 이유는 '이 세상에 어느 것과도 같지 않는 단 하나뿐인 이 모양대로의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거지? (영화에서도 이 메시지를 계속해서 '원 앤 온리 카페'등으로 보여 주거나 '원 앤 온리 블라블라' 하는 얘기들로 강조하고 있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을까, 모든 생명은 삶이 침해당할 때 막대한 고통을 느끼고, 자신의 오감으로 주변의 것들을 느끼며 존재하는데? 그 존재가 단 하나뿐인 독보적 특징을 지녀서 생명이 소중한 게 맞는가? 그렇다면 생명은 살아있는 그 자체의 이유로 무조건 소중한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구분되는 어떤 특질을 지녀서 조건부로 소중한 거네?


3. 익스펜더블로 살다가 바로 뒷버전의 나를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회사를 하루씩 나눠서 가고, 남들은 못 겪어보는 이상한 짓(!) 하면서 그냥 합의하고 이점을 활용하며 연합하여 잘 살 것인가?


4. 이것은 영생이 맞는가?

앞의 논의들과 중첩되는 지점이다. 기억을 가진 새로운 나는 과거의 나와 연속성을 갖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나는 불사조로 영생하는 게 맞는가. 매일 죽고 새로운 나로 프린트 되어도, 내 세포들이 몇 주기를 거쳐 어느 순간 모두 새로운 세포가 되더라도 한 사람의 존재는 이어지는 것처럼 나는 영원히 프린트되며 영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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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키 17>로 가면, 이 세계가 조금 더 확장 강조된다.

다만 주제가 너무 많아져서(혹은 주제가 많아지는 걸 효과적으로 감춰서 내포하지 못해서) 이게 효과적으로 잘 담겨 전달되는지 조금 아리송하긴 하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좋은 철학거리와 사유할 것들은 아래와 같다.


내일의 나(18)는 오늘의 나(17)를 다독인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침입당한 자는 침입한 자에게 말한다. 외계인은 너네라고.

최하층 불가촉천민은 말한다. 나는 팔 것이 없어 내 삶 자체를 팔았노라고.

군림하는 자는 말한다. 대중은 개돼지고 계급은 분명 존재한다고.


이것들이 그런데 너무 직접적 비유로 나오기는 한다. 직접적 비유가 왜 나쁘냐, 영화든 소설이든 초등학생이 봐도 메시지가 분명해야 한다,라고 하면 거기에도 동의한다. 분명 울림이 있고 특유의 유머가 들어있는 귀여운 우화이지만, 가끔 봉테일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일차원적 설명으로 느껴질 때가 있는데 <설국열차> 때 그랬고, <기생충>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이 영역부터는 개인 취향의 영역 같기는 하다. 좋은 주제를 너무 직접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흥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얘기하고 있고 그것을 논하는 대사가 너무 직접적이어서 나는 미키 17이 조금 피곤하게 느껴지는 취향이다. 배양육 얘기까지도 가다 보니...


미키 17과 18이 연속된 기억을 가진 채 존속되므로 영생하는 거라는 가정 하에 이 주인공이 죽어도 계속 살아나는 불사조라는 건데 그렇다면 긴장감이 많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긴장감을 느껴야 할 부분을 '멀티플'이 범죄자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걸로 설정해 둔 거고. 그런데 어쩐지 체제 모르게 실수로 생겨난 멀티플이 들킬까 봐, 그래서 두 개의 나 중에 하나가 죽어야 해서 느껴져야 할 긴박감이 잘 없다.

여러모로 주인공이 서사 중 죽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 대신 필요한 다른 긴장이 너무 약한 느낌이다. 그냥 이 전체를 거대한 우화 동화로 보기에는 소설보다 나아간 느낌이 들지 않는다. 위기마저 가벼운 우화처럼 취급되는 탓에 빌런들의 행동이 위협적이지 않고 그러다 보니 조금 지루해서 시계를 보게 된다.


소설보다 가장 진일보한 부분은 강아지 같은 벌레의 깜찍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할지는 모르겠지만, 누구 말처럼 오늘의 기분을 구할 수는 있으니까. 이 영화 속 벌레들은 인류를 독재자로부터 구해주기는 했다. 2025년 현재 (구) 한국 나이로 마흔을 맞은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경이롭고 그가 잘생기게 나오는 영화가 의외로 드물어서 그 또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다. 또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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