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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PTA, 올해 최고의 영화

by 랄라

밥은 아내 퍼피디아와 함께 묶여 영웅으로 일컬어지던 활동 전성기 때도 항상 그들의 혁명단체 '프렌치75'에서 주변인에 가까웠다. '나 일단 수제 폭탄 개잘만드는 전문가고 관심 있어서 오긴 했는데 정확히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가 혁명에 임하는 그의 주된 태도다.

번역가 황석희 씨가 어디선가 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저는 '왜 이 직업을 갖게 되셨나요?'를 물었을 때 거창하게 사명감 얘기하는 사람을 믿지 않아요. 어쩌다 보니 이걸 하고 있네요.라고 하는 사람을 더 믿어요."(토씨가 정확하진 않을 수 있음.) 정상적 사고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의 성실한 책임감 같은 것이야말로 값진 것이다. 대단한 사명을 거창하게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 실제로 퍼피디아처럼 위선자이기 쉬운 반면 내가 여기서 뭐 하는지에 대해 꾸준하게 고찰하는 사람은 비장 떨 겨를 없이 자기 몫을 해낸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16년 혹은 17년 후, 암구호 따위 잊어버렸고 약에 절어서 무능하게 살고 있지만 애비 밥은 그런 면에서 강하다. 그는 어떻게든 make it 해내는 아빠다.

에필로그 단계에서도 내가 친아비네 아니네를 전혀 끝까지 논하지 않는 것(딱히 이제 와서 중요한 것도 아닌 게 맞으므로), 동료를 배신하고 천륜을 무시한 어미를 오래 미워하지 않는 것. 명백히 그냥 멋진 사람이 만든 멋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

"시간은 실재하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를 지배한다." 시간이란 우리 인식의 한계가 상정한 개념에 불과할지 모르고 이념도 그렇다. 이념은 시간에 닳지 않는 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소중한 가족에 앞서는 절대적 이론도 아니다.



급진적 성향을 지닌 몽상가 리더들은 현실에서도 종종 내로남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서 그리는 퍼피디아 베벌리힐스가 매우 정확하게 그렇다. 그는 자신이 호언장담하며 꾸던 몽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민폐를 끼치며 스스로는 정신승리한다. 감옥 가기 싫어서 록조에게 붙어먹고 증인보호받으러 들어간 집에서 지껄이기를 "모든 혁명은 악마와 싸우다 결국 자기들끼리 싸우며 끝난다",? 네가 할 소리니? 악마는 바로 너야


뒷감당도 못할 거면서 굳이 객기 부린 도발, 남편이 있으면서도 죄책감 없이 다른 남자와 내통하여 아기를 갖고(당했다기엔 너무 즐겼음) 남편에게 아기 아빠가 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중요한 사실도 함구한 채 일방적으로 떠나버리고. 기본적인 부모로서의 도리는 하지 않으면서 네가 변했네 적반하장 주장하는 걸 이해할 순 없다. 의도가 선했고 업적이 있다고 해서, 한 급진적 인간의 인성적 에러가 용서될 순 없다. 최소한의 자기반성도 없이 비도덕한 개인적 삶을 사는 사람, 성과가 어떻든 그의 행위는 설득력을 잃는다.

당신의 혁명은 다른 무엇보다 당신의 인성적 결함 때문에 실패했다. 당신이 약해서도, 동료가 약해서도, 상황이 나빠서도 아니다.



"당신은 비유대인인 미국인 가정에서 자란 백인인가요?"

우생학, 특정 집단 우월주의는 끝나지 않았다.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의 저서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 따르면,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에서 샤이 트럼프 지지자들의 응답 회피에 따라 트럼프 비당선이 거의 확신에 가까이 예측되던 가운데, 사실 트럼프가 승리했던 주의 주민들의 구글 검색창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단어는 negro, nigger였다고 한다.

PC의 시대가 왔다고 사람들의 가장 솔직한 내면에서 편견과 차별이 갑자기 사라질 리는 없다. 역사는 반복되고, 우생학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역강간'을 주장하며 더럽혀진 게 아니라고 호소하던 록조는 업보를 갚아야 할 시간에 이르면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역독살 당하고, 불태워진다.



몸이 날랜 보드 삼 형제를 입 다물고 열심히 따라 뛰다가 12층에서 추락하는 디카프리오(이 영화에서 암구호 항의 다음으로 제일 웃긴 장면. 기다려! 힘들어! 등을 추잡하게 외치지 않는 게 매우 미덕임). 그가 추락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조차 "아, 왜 잡혔어!"라는 등 동요하지 않으며, 묵묵히 조치를 취해 데리러 가서 일말의 질책도 하지 않는 세르지오 센세. 센세는 이 영화 속 모든 인물의 정신적 기둥이다. 센세는 뛰어난 연대가이고 좋은 이웃, 윌라의 뛰어난 아빠이기도 하다. 관객에게 번역되지 않는 센세의 스페인어는 아빠, 어른의 언어이며, 나쁜 옴브레에게도 이유나 책임을 묻는 일 없이 관대하게 포용의 손을 뻗는 말이다.


"자유가 뭔지 알아? 두려움이 없는 거야, 톰 크루즈처럼(Just like Tom fucking cruise)."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센세처럼 절명의 위기가 턱 끝까지 왔는데도 웨이브를 떠올리며 호흡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고, 부조리를 반대하며 큰 세력과 싸우는 사람은 '여동생'의 목숨을 걸고 하는 적의 협박 때문에, 지켜야 할 사람들의 안위를 지키느라(감옥 갈까 봐 부는 거랑 다르다) 동료를 배신해야만 하는 순간을 겪는다. 소중한 것을 많이 가질수록 부조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뭐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지하로 여러 겹의 문을 잠그고 처박혀 들어가서 자기 스스로를 가두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 모험가들도 참 유감이다. 자신들이 경멸하는 순혈 아닌 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도 코미디고 자기네 예비회원 정보 캐낼 때조차 자기들이 경멸하는 사람들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 스스로가 웃기다는 걸 모른다. 흉악한 사람들인 주제에(인상도 다들 한따가리 함) 천진난만하게 '크리스마스 모험가'라는 이름을 하는 것도 웃기고 소년 이미지의 '모험가'라기엔 대부분 살찌고 늙고 돈 밝히는 노인네들인 것도 의도대로 밉상인데,

이 와중에, '바질(버질?)' 토니 골드윈 너무 오랜만이다. 악역인데도 배우는 넘 서늘하게 멋지잖아요.



장안의 화제 존잘러 폴 토마스 앤더슨. 기나긴 2025년 추석 연휴 동안 <체인소 맨>과 함께 가장 핫했던 영화. 인종, 성별, 세대, 국가 간, 서로에 대한 혐오로 아사리판 나고 있는 지구촌 시국에 적절한 정치 영화일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런 의미 부여하지 않아도 그냥 대부분의 사람에게 직관적으로 매우 재미있을 영화이며

올해 본 영화 중 <시너스: 죄인들>과 더불어 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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