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
당연한 할 말을 하면서도
혹여나 누군가는 나 때문에 불편할까 농담인 척 얼버무려 웃어넘기는,
나이만큼 어설프고 어색한 넉살의 그 얼굴 표정.
그 표정을 아는, 그런 얼굴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만든 영화.
주인이는 학교에서 성격 좋은 핵인싸인데다 집에서는 알코올 중독자 엄마와 너무 어린 동생을 고루 보듬는 착한 딸이다. 작은 유치원을 운영하는 엄마가 늦게 돌아오는 날엔 동생과 함께 집 청소를 해놓는 든든한 장녀, 동생 운동화에 묻어있는 흙을 보고 '아, 아빠 만났어?'하고 알아채는 눈치 빠른 애어른이다. 어느 날 학교에서 같은 반 남학생 수호가 전교생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이의 생활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상대방의 인생이나 상황을 자기 프레임에서 멋대로 재단하는 태도는 내가 일생 싫어해온 것 중 하나다. 어떤 사람의 인생이 자기보다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선민의식, 자기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에 대한 우려를 가장한 비난의 시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자세히 공부할 마음도 없이 함부로 뱉는 말들. 사람들은 자기 프레임에서 다른 사람의 행불행을 멋대로 예단한다. 프레임이 좁고 보잘것없을수록 남의 불행을 단정 짓는 말을 자신 있게 뱉는다.
누군가에게 닥친 사고나 사건이 그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는 있지만, 과거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행복하지 못할 이유나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고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왜 타인의 인생에 자기 멋대로 평가를 내리는가. 그 사람 인생, 그 사람 세계의 주인은 그 사람 자신인데. 자기 세계에서 각자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와 행복의 길은 사람 수만큼 다양하게 존재한다.
언젠가 한 스무 살 청년을 인터뷰할 일이 있었다. 인터뷰를 주도한 한 중년 남성은 청년이 무슨 대답을 하든 미간을 찌푸리며 과도하게 따뜻한 눈빛과 끄덕임을 곁들여 청년을 응시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청년이 나에게 말했다. "그분, 왜 그렇게 저를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세요? 하하하 좀 기분이 안 좋았어요. 제가 그렇게 불쌍한 사람은 아닌데..."
앞길이 구만리 같은, 시간이라는 재산을 가진 아름다운 스무 살 청년을 왜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자신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왜 그 사람이 앞으로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며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재치, 미모, 인생에서 남은 시간,이라는 커다란 재산들을 가지고 있는 청년보다, 요행 어린 시절 별일 없이 자랐다는 이유로.
아픈 사람을 인터뷰할 때도 비슷한 경우를 많이 본다. 아픈 사람을 인터뷰할 때 준비해야 할 건, 공감이나 동정 같은 걸 담은 얼굴 표정이 아니라 그 병에 대한 철저한 공부다. (내가 유재석도 아닌데, 나 따위가 찾아가서 안쓰러워하는 얼굴 하는 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희귀한 병일수록 더 그렇다. 그 질환이 어떤 경로로 옮는 질환인지, 조심할 필요 없는 것에 대해 과도하게 자꾸 조심하라 괜찮냐 언급하는 건 아닌지, 용어를 틀리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은지, 민간에서 잘못 널리 믿기는 정보를 함부로 얘기하는 건 아닌지(생각해서 해주는 일이고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용납되는 태도가 아니다. 희귀한 질환을 오래 앓는 사람들이나 그 보호자는 지겹도록 들을 틀린 말이니까 종종 2차 가해가 된다).
처음에 사람들이 불편할까 농담으로 넘기려던 주인이는, 수호가 끈질기고 집요하게 서명을 요구하는 바람에 결국 모든 걸 오픈해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이후 숨기는 거 없이 친구들에게도 오해 없도록 모든 것을 오픈한 주인이가 2차로 안쓰러워졌던 건, 친구냔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들도 18세라고 하지만, 거 친구들 참 부자연스럽고 별로다. 그런 것들까지 다 웃으며 끌어안고 애쓰는 주인이 너무 예쁘고 대견하다.
친구들이 불편할까 봐, 그리고 자기 자신은 그 일이 인생을 망쳐버린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오픈했을 거다. 그런데 그런 주인이를 대하는 친구들의 태도는 참 기이했다.
비밀이 많은 사람을 좋아하진 않는다. 나는 비밀이 많지 않은 편인데, 그건 내가 남의 비밀 같은 얘기(가정사, 과거사, 실수담)를 들었을 때 사실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도 잘 못함. 편견이라면 미안하지만, 비밀이 많은 사람은 보통 남의 아무것도 아닌 얘기에 예단을 잘하거나 뭔가 생각이 많다고나 할까. 그래서 자기 얘기도 종종 주저한다고 해야 하나(물론 말을 안 하는 건 당연한 자기 선택이고, 자기 얘기를 어렵게 나에게 해준다면 고마운 거지만). 엄청 오랫동안 잘못 곡해해서 기억하는 건 덤. 이런 사람들은 꼭 10년 후쯤 당사자는 기억도 안 하는 일을 갑자기 틀린 해석과 평가가 담긴 콘텐츠로 묘하게 바꿔서 얘기해주곤 한다.
영화에는 악역이 거의 없긴 하다(아니 있다. 회피형 무능자 쓰레기 아저씨 아빠랑, 뭐 나오지는 않지만 가해자랑...). 선생님은 사려 깊고, 남동생과 엄마는 너무 사랑스러운 가족이며, 미도(고민시)를 포함한 모임 사람들은 서로를 자신처럼 아껴준다. 수호 역시 학교의 어떤 아이들보다 사려 깊고(진실을 처음 알았을 때 수호 본체 배우 연기 미쳤다. 뒷모습으로도 연기를 함...) 쿨하다. 주인이의 남자친구도 친구들도 그냥 평범한 열 여덟 자연스러운 청소년들이지 나쁜 아이들은 아니다.
한국 영화가 19세 이하 아동을 다루는 방식을 종종 좋아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아이들은 자주 굉장히 기계적으로 묘사된다. 울거나 두려움을 표시할 때 가장 크고 약한 비명을 지르는 존재, 폭력을 강조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강조되는 연약함의 상징, 누군가를 배제해야 할 때 철저한 순수악으로 왕따의 가해자가 되는 존재 등으로. 현실의 아동과 청소년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의 여고생이란 25세의 서수빈 배우가 완벽하게 재현하는 '여고생 발성'으로 얘기하며, 어떤 어른보다 높은 텐션으로 약동하는 생동감 넘치는 존재들이다.
실제의 아동들은 누구보다 창의적으로 멋진 대답을 해 본질을 꿰뚫고 허를 찌르곤 하는 존재고, 실제의 청소년들은 누군가가 무슨 일을 당했다고 해서 그 아이에게 못되게 하지 않는다. 정가은 감독님의 인물들은 현실의 청소년들처럼 대부분 착하고 순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아, 실제론 정말 저렇겠구나 고개가 끄덕여지도록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직 한참 성장 중이라 가끔 존재론적으로 처연하면서도 한 인간으로서 사랑스러운 느낌이 든다.
엄마 미소 짓는 순간부터 스크린을 찢고 영화 속으로 들어가 책상을 뒤엎고 싶던 순간까지, 올해 가장 재미있었던지는 몰라도 올해 가장 positive/negative 양쪽으로 마음을 흔들어 놓은 이야기가 되기는 할 것 같다.
못된 사람은 마음을 꼬집는다. 무디고 모르고 우악스러운 사람은 마음을 할퀸다. 못된 사람보다, 정확히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의 마음을 훨씬 할퀸다. 정가은 감독님 전작은 벌새만 알고 있는데, 좀 우울하고 피곤했던 기억이지만 그때도 세상의 아이들을 향한 시선이 유난히 사려 깊고 고운 분이라고 느꼈다. 이런 시선을 가진 분들만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브레이크를 밟지 마세요.
씨네필 회사 후배 추천으로 보게 된 영화인데, 영화 보고나서도 '사과'의 의미는 잘 모르겠어서 물어봤더니 '청송교도소' '청송사과'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씨네필은 모르는 게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