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 소라, 해피 엔드
반골 성향이 충만하지만 사실 규범이 정한 하지 말라는 짓은 잘 안 하는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어서 얘네들의 행동에 크게 공감하기는 어렵다. 그건 세대차가 아니라 성향차다.
일본의 최신 세대를 포함해 어느 사회의 한 세대가 부당한 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포기하게 되는 것은 대략 이런 과정일 것이다. 낡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하는 누군가의, 너무 잦은 절망의 반복을 목도한 결과.
'학창 시절은 고통이다. 내가 하지 않을 규칙 위반을 저지르는 수많은 아이들 때문에 나까지 통제를 받아야 한다. 부당한 규칙에 당장 일차원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갈등만 조장하고 당장의 생활을 더 불편하게 할 뿐이다. 어차피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사람과 당장 싸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역효과만 불러올 뿐이다.'
그런데 자신이 규칙을 바꿀 수 있는 날이 도래하면 너무 시점이 지나가버린 후인 나머지 그만 잊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어느 정도 그렇다.
겉으로는 말 잘 듣는 척, 심기일전하며 내가 이 일을 바로잡을 날을 기다리지만 바로잡을 수 있는 시점에는 어떤 의욕도 사라져 있고 마는 것이다. 대체로 내 능력치와 갈망은 시점이 일치하지 않으며 그것은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고 절망의 소재이기도 하니까.
앞 어깨를 툭 하고 치며 씩 웃는 것만으로도 다 풀릴 수 있는 사이가 있다. 우정이 내 세계에서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 없이도 살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고 나면, 나와 다른 친구의 싫은 점(너무 다른 정치 성향이나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에 흐린 눈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성장하는 건 친구를 잃는 과정이다. 아무도 영원히 내 옆에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사람인 그대로 머물 수 없다. 그 사람이 '나'와 같지 않아서 치고받고 싸우거나 말다툼하는 유년기가 지나가면 우리는 '나'와 동일시했던 누군가를 잃고, 재정비된 관계(늘 서로 웃어주기 때문에 겉으로는 더 가까워 보인다)의 새로운 사람을 다시 만난다. 운이 좋으면. 아니면 그렇지 못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