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일, <국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하다는 아름다운 가오(かお)를 타고났으며, 배운 적도 없는 이나바우어 폼 또한 타고나게 우아했던 타치바나 키쿠오. 혈통 없이 재능만 뛰어나 시대의 불운아 운명을 타고난 그는 간사이 지방 최고의 가부키 집안 '한지로'상의 눈에 들게 되나, 그렇게 한지로의 눈에 든 당일 야쿠자인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고, 그길로 한지로 가문의 제자로 입문하게 됨. 이 집에는 어차피 가문의 후계자가 될 아들, 키쿠오와 동갑내기인 슌스케가 있었는데, 둘은 묘하게 경쟁관계이면서도 베프이자 형제인 사이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저런 시대와 운명의 장난으로 두 사람은 계속 본의 아니게 대립구도에 놓이기도 하고, 애정사라는 게 맘대로 되는 거겠어 키쿠오의 여자친구가 결국 살리에르처럼 2인자 운명이라 우수에 젖어있는 슌스케를 사랑해서 둘이 함께 사라지기도 하게 되는데...... 안타까운 게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잘못이랄까 악의 같은 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미미하다. 결국 운명의 대세가 그랬던 문제인 건데, 그렇게 사나운 팔자를 살아내야 했던, 인생이 공격적으로 퍼부어대는 고난을 계속해서 받아내야 했던 한 인간 국보의 이야기. 다만 키쿠오 자신이 스스로를 비극의 상황에 몰아넣는다는 인상은 있었음. 뭐 인기 가도를 달리다가 망할 저널리즘 때문에 명성이 먹칠 당하고 삐끗해서 행사 좀 뛸 수도 있지, 그런 시기에 싸구려 자동차 타고 행사 가다가 펑크도 좀 날 수도 있지. 고난의 시기에 벌어지는 또 작은 고난들을, 해프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던 키쿠오. 겹겹이 쌓인 원통함 때문에 모든 것이 견디기 힘들었던 키쿠오. 그런데 혈통 때문에 일생 고통받은 놈이 정작 자기 혈통은 야망을 위해 개무시했다는 거......
아무리 뛰어난 자신이어도 넘을 수 없던 '혈통', '피'의 벽, 이건 재일교포인 감독님의 정체성과 어느 정도 상관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구성원이 되어도 늘 이방인 취급받았을 삶이 투영될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영화 속에서는 그 귀한 혈통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결말로 가면, 결국 혈통이 물려준 유전병으로 인해 생을 이르게 마감하도록 귀결되기도 한다.
인슐린이 발견되기 전, 당뇨가 치명적으로 무서운 병이던 시대. 텔레비전이 보급되지 않아 가부키가 대중의 <무한도전> 이던 시대. 안방에 앉아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늘어난 시대가 오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는 시기까지, 얄궂은 운명을 받아내며 곁에 있는 이들을 떠나보내고 살아남은 키쿠오는 90세를 넘겨 '국보'라는 칭호를 얻는다. 가혹한 역사나 전통 속, 풍파 많은 예술가의 개인의 삶. 시간을 가로지르면서 그가 어릴 때 겪었던 일들은 아득한 전생의 일처럼 터무니없는 일이 된다. 무언가 경지의 것을 완성하기 위해, 그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시대가 흐르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기도 한다. 예술이라는 건 의외로 시간에 닳지 않는 불변의 무엇이기가 어렵다. 그리고 경지에 다다른 자만 알 수 있는 최후의 한 끗 따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경우도 많다.
<국보>는 시간을 거대하게 가로지르는 이야기다. 벚꽃이 눈처럼 날리는 길, 형제처럼 자란 두 중학생이 너무 예쁘게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이야기 끝으로 가면 무대에 내리는 눈과 겹쳐 보이고, 그 외에도 과거에 각인된 형상들이 돌고 돌아 다시 겹쳐 보이는 장면들이 많다.
무자비하게 역사를 횡단하는 긴 시간. 세 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아름답기는 한데, 천만 영화 특유의 느끼함이 많다. 관객이 천만 이상 들려면 아무리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담백한 영화를 추구하는 일본이어도 영화가 다소 느끼해야 한다. 그리고 다소 클리셰 범벅인 면도. 이게 모든 이야기는 결국 어떤 뻔한 방향으로밖에 흘러갈 수 없기는 하고 그 과정이 중요한 건데 어떤 대작으로서의 독창성이나 못 보던 훌륭함은 안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패왕별희와 같은 류의 먹먹함을 기대했다면 그건 얻기 어려울 수도 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비슷한 코드의 슬픔이 아니긴 했음.
배우들의 마스크도 연기도 너무 영화에 잘 녹아 들어서 세 시간의 몰입이 쉬웠던 것도 있다. 약간 호랑이처럼 생긴 키쿠오와 옛날 가수 김원준 닮은 슌스케...... 둘 다 마스크도 뛰어나고(잘생겼다기보다, 굉장히 배우적(?)이고, 각 캐릭터에 마스크가 찰떡임) 연기는 더 뛰어나다. 어쩌면 낯설거나 거북할 수 있는 장면들이 배우의 힘으로 설명되는 모먼트가 굉장히 많았던 것 같음. 거대한 시간을 횡단하며, 운명이 퍼붓는 공격을 받아내 온 당신의 그 가오(かお). 하지만 영화 속 키쿠오가 타고난 얼굴과 바이브를 지녔듯 그저 스크린 너머에 서있기만 해도 저절로 슬픔이 묻어나는 장국영이, 이 영화에는 사실 없다. 이 영화가 패왕별희만큼 먹먹하게 보이지 않는 게 장국영이 부재해서이기만 한 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