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음식으로부터
여름의 끝 그리고 가을의 시작
올해 가을이 시작될 무렵 동네 과일가게에서 국산 밤을 샀다.
내가 어릴 때는 시장에 가면 국산 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산 밤이 많이 나와 국산 밤을 보기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국산 밤을 일부러 사서 먹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국산 밤은 먹기 편한 중국산 칼집 밤이나 맛밤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포슬포슬한 가을의 맛을 느껴볼 수 있다.
마침 가까운 곳에서 밤을 판매하고 있어서 한 팩 사 올 수 있었다.
왜 한 봉지가 아니라 한 팩일까? 요즘은 과일 포장에도 지나친 정성을 들인다. 내가 사 온 밤은 스티로폼 접시 위에 밤을 적당량 올려 두고 랩으로 덮어 고정한 제품이었다. 그러니 한 봉지가 아니라 한 팩이 더 적절하다. 올해 첫 수확한 '찐' 가을밤이라, 과일 가게 사장님께서 냉장고에 일주일 정도 후숙해 두면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김치 냉장고 한켠에 두고 일주일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인터넷에서 봤던 '에어프라이어에 밤 굽는 법' 영상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 영상을 다시 찾긴 어렵고, 기억나는 대로 해보기로 했다. 왠지 간단하게 구워서 쉽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밤을 담은 그릇에 물을 채우고 소금을 적당량 풀어 주었다. 밤을 소금물에 담가 놓으라는 장면만 기억나서, 얼마나 담가놔야 하는지는 몰랐다. '이쯤 되면 밤 껍질이 불었을 거야.' 하며 밤을 건져냈다. 밤의 뾰족한 부분에 열십자 모양으로 칼집을 낸 뒤 에어프라이어에 구우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껍질이 단단해서 칼집 내기가 버거웠다. 이러다 손 다쳐서 병원에 갈 수도 있겠다 싶어 칼집을 내지 않은 채로 밤 열 알 정도를 에어프라이어에 넣었다. 밤을 모두 넣기에는 이 방법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다. 얼마나 구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오래 구우면 잘 익을 거야!'라는 모호한 생각으로 시간을 설정했다.
저녁 먹기 전에 굽기 시작한 밤은 식사 중에 다 구워진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모두 정리한 후, 후식으로 먹으려고 구운 밤, 작은 과도, 접시를 들고 서재에 앉았다. 아이는 숙제를 하고 있었고 남편은 굉장히 오랜만에 책을 읽고 있었다. 밤 껍질을 까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에어프라이어에서 구워지면서 껍질까지 바삭해져 칼을 이용해 까려 하니 껍질이 바스러졌다. 밤 알맹이는 율피와 딱 붙어 있어 떼어 내려고 하면 같이 부서졌다. 상상했던 것처럼 쉽게 밤을 먹을 수 없었다. 두세 알쯤 깠을 때 먹기가 너무 불편해 치워 두고, 남은 밤은 내일 아침 물에 넣어 삶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아이의 등교 준비를 하면서 밤을 알맞게 삶고 채에 받쳐 식혔다. 아이가 학교에 간 후에는 삶은 밤과 함께 일하면서 먹을 간식을 좀 더 준비해서 서재에 앉았다.
일하는 책상 위에 삶을 밤 몇 알과 칼, 껍질 버릴 봉지를 올려 두었다. 밤만 먹기 아쉬워서 냉장고에 마지막 남은 무화과를 꺼내 손질하고, 그릭요거트를 가운데 올린 뒤 꿀을 뿌렸다. 마지막으로 가을에 어울리는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내렸다. 별건 없지만 이렇게 차려 놓으니 베로니크 드 뷔르의 소설 [체리토마토파이]에 나오는 '잔 할머니'가 된 기분도 들었다.
우리는 점심 식사 후에 텔레비전을 처음 켰다. 비시에 살 때 르네는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왔다. 집에도 자기가 일하는 방이 있었지만 그이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점심은 집에 와서 먹었다. 내가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그이는 상을 차렸다. 후식까지 먹고 나면 그이는 빵, 소금, 물을 치우고 식탁보의 부스러기를 쓸어냈다. 내가 설거지를 하면 그이는 커피를 준비했다.
[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 지음. 이세진 옮김. 청미 출판사 펴냄
소박하게 차려낸 아침 식사.
물론 직접 기른 것들은 아니지만 여름의 과일인 무화과와 올 가을 첫 수확한 밤이 함께 있으니 계절감이 확 와닿았다.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이 내 식탁 위에 있다.
한 손에는 삶은 밤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호기롭게 밤을 집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삶은 밤이라고 해서 껍질을 까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왕 사온 밤을 먹어야지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까 보았는데, 한 네댓 알 까다 보니 손가락에 감각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문득 '아, 나는 제대로 밤을 까본 적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쯤 되면 할머니는 시장에서 밤을 사다가 한 소쿠리 삶아 두셨다. 보통은 할머니가 과도칼로 반을 쪼개 주시면, 작은 티스푼으로 밤을 퍼서 먹었다. 간혹 할머니는 딱딱한 밤껍질과 율피를 모두 벗겨내 그릇에 담아 두시곤 했다. 보송보송한 밤을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면 달큼한 밤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어린 시절에는 계절의 맛이라는 걸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고 조금씩 살림을 하다 보니 제철 음식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그 계절이 오면 떠오르는 음식들이 생각이 난다.
이전에는 마트에 가서 밤을 봐도 사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 말고는 좋아하는 식구가 없기도 했고, 삶는 일이 번거롭게만 느껴졌다. 지금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철 음식이 먹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그동안 해 먹지 않았으니 밤 껍질이 이렇게 단단한지 몰랐다. 삶아서 껍질을 까는 일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줄도 몰랐다.
율피는 약재로도 쓰인다던데, 그냥 딱딱한 껍질만 벗겨내고 율피까지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어도 될까?
번거롭지만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 더 가을밤을 먹고 싶어 또 사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