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제27회 서울세계무용축제, 듀이 델 <봄의 제전> 리뷰
서울은 되려 너무 많은 기회와 가능성이 있어서, 놓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게 괜찮을지, 저게 괜찮을지 비교하다 결국 선택하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이를 조금 해결하고자 한다면, 적절한 방법이 있다. 바로 “축제,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것.
축제는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적극 환영하는 자리이다. 진입장벽이 낮고, 무엇보다 다양하고 질 좋은 프로그램을 골라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제27회 서울세계무용축제>도 현대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이다. 특히 이번 연도에는 관객들이 보다 쉽게 느끼고 반응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로 구성했다고 한다.
그중 나는, 9월 5일 대학로예술극장에서 듀이 델의 ‘봄의 제전’을 감상했다.
웹사이트에 올라온 공연 이미지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벌집 수확할 때 입는 보호복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거대벌레와 마치 나무껍질을 연상케 하는 무대 디자인. 특히 제목이 ‘봄의 제전’이니, 아마도 봄의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하는 직관적 궁금증.
공연 시작 전 관객석에 앉으니 그 기대감은 더욱 극대화되었다. 생각보다 세트 디자인이 이미지와 똑같았고,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는 몰라도 질감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니, 구미를 당긴 건 음악이었다. 이 작품은 현대음악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50분 내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과 함께하는데, 스토리텔링이 강력해 마치 영화 한 편을 감상한 듯했다.
처음에는 음악이 되려 고전적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스타워즈나 해리포터 OST처럼 멜로디가 극을 이끌어가는 비교적 스토리가 명확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 현대음악, 영화음악은 멜로디가 뚜렷하기보다는 뭔가 좀 더 분위기를 형성하는 맛이 있으니까.
그러나 ‘봄의 제전’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음악”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발레곡으로, 1913년 당대 많은 논란을 야기한 가히 혁명적인 곡이었다. 사실 지금 듣기에, 봄의 제전은 전혀 난해하지 않고 오히려 세련된다고 까지 여겨진다. 그럼 잠깐 어떤 멜로디와 리듬인지, 잠깐 감상해 볼까?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버전이다.
https://youtu.be/EkwqPJZe8ms?si=gy_dvVOHlc0RA5bt
이런 명곡을 재해석한 듀이 델의 무대는 그럼 어떠했나. 무용, 무대의상, 세트디자인, 조명 효과 등의 각 요소요소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세트디자인은 뚫린 나무구멍 안에 관객이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나무 구멍 안에서 우리는 벌레, 곰팡이, 나뭇잎이 된 무용수들과 함께 뛰놀고 있었다.
의상, 세트 미술적으로도 좋았지만, 섬세한 조명효과는 디테일을 더했다. 처음 공연 시작할 때, 암전상태에서 애벌레가 점점 보이기 시작하는데 실은 내 눈이 어둠에 적응한 줄만 알았다. 그만큼 조명이 아주 천천히 켜졌고, 음악과 더불어 벌레가 사각사각되는 음향효과도 더해져 사실감을 주었다.
그리고 춤동작으로는 위아래로, 그리고 횡으로 음악의 거친 파형에 따라 들쑥날쑥하는 동작이 계속되었다. 두꺼운 의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화려하기보다는 거칠고 반복되는 형태의 동작이 많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투박한 동작이 원초적인 리듬에 잘 부합했다. 특히 무엇보다 좋았던 건, 무용수의 몸이 전형적으로 빼빼 마르고 길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그냥 나와 같은 일상적인 몸도 표현수단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사실 가끔씩 말과 글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내 욕구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곤 하는데, 특히 무용극이나 음악공연을 볼 때면 내 몸을 옥죄는 관객석이 참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각도에서 같이 무대에 올라 그들을 관찰하거나, 함께 팔다리라도 들어보면 좋으련만.
그런 면에서 퍼포머 ‘듀이 델’은 음악과 춤의 추상성을 잘 살리는 것 같다. 추상적인 의미의 음악과 춤, 그리고 구상적 의미의 세트디자인, 조명효과 등의 시각 디자인을 조화롭게 잘 버무린다. 듀이 델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그들의 다른 작품도 감상할 수 있는데 다른 작업도 매우 인상적이다.
역시나 선이 고운 쪽보다는 반복되는 투박한 동작을 통해 어떤 내면의 의식을 꺼내는 듯하는데, 이러한 일련의 탐구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만나 궁극적인 결과물을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그들의 스타일이 음악과 적절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실제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의 내용은 러시아 이교도의 의식을 형상화한 것으로,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산제물을 바친다는 서사를 담고 있다.
시간은 금세 흘렀다. 이미지도 직관적이고 내용이 어렵지 않다 보니, 무대가 끝나고 나서도 관객들이 수다를 떨 장이 펼쳐졌다. "이때 이 동작은 살충제를 뿌리는 건가? 나중에 다 보고 나니까 오프닝이 왜 그렇게 길었는지 알겠어." 등의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것을 엿들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오프라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상인 것 같다. 내가 무엇을 느끼든, 이에 대해 반대하거나 동의하는 사람과 같이 문화를 감상한다는 건 꽤 큰 장점이다. 요즘에는 점점 개인화되어간다고 하지만, 나는 되려 사람들이 지구라는 거대한 집단에 속하는 집단사회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누가 어디서 뭘 하는지 속속들이 알게 되면서 이게 맞나 저게 맞나 하는 눈치를 오히려 계속 보게 되고, 과거 가족 구성원들을 사람이 아닌 하나하나의 생산수단으로 보는 농경사회처럼, 지구는 오히려 거대 디지털 농장이 되어가는 것만 같은 인상을 받곤 한다.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초연 당시 파격적인 곡과 무대 연출 때문에 현장에서 반대파와 찬성파로 나뉘어 극렬한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사실 나는 현대에도 이러한 장면을 원한다. 현대에는 알고리즘으로 강화된 자신의 의견만 피력할 뿐, 갈등을 통합하는 과정, 화해의 장소가 점점 사라진다고 느낀다. 최근 왕왕 있는 오프라인 모임도 사실상 돈을 내거나, 특별 지위와 문화를 향유하는 특정 집단처럼 보이지 어떤 순수한 대화의 장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바로 지금, 축제의 진정한 역할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많은 축제들이 점점 마케팅의 장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 같지만... 축제만큼은 정량적 평가가 아닌 정성적 평가로 이루어져야 한다. 많은 수의 관객 유입도 중요하지만, 관객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질 좋은 경험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생각한다.
살과 살로 맞대어 함께 문화를 즐기고, 또는 대화하고, 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엿들으면서 우리 안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야 한다. 축제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축제는 ‘한번 잡숴 봐~’하는 마트의 시식코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듀이 델의 '봄의 제전'은 나에게 일종의 시식 코너였고,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경험에 같은 브랜드의 다른 음식. 즉 <서울세계무용축제 SIDance 2024>가 엄선한 다른 공연도 보고 싶어 졌다. 아쉽게도 이제 거의 끝나가지만, 짬을 내어 주말에 다녀올 생각이다.
이처럼 다른 많은 축제들도 사라지지 않고 성황 했으면 좋겠다. 축제에서 모두들 쉽게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며, 또 격렬히 토론도 하는 그런 마음 편한 장소가 되었으면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