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늘 Nov 09. 2024

해학의 멋이 담긴 광대의 소리

[Review] 수림 뉴웨이브 국악 독주회 : 강민수 <광대>

글쎄, 우리 것이라고 하면 어떤 게 있을까. 어렴풋한 기억으로 어릴 적 공부했던 것을 잠시 생각하면, 전통예술에는 마당극, 마당놀이, 사물놀이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양반탈, 선비탈, 백정탈 등의 놀이에는 풍자와 해학이 담겨 있다고, 시험 볼 때 외웠던 기억이 있다. 그래 그 풍자와 해학, 90년대 개그프로그램에만 해도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 예능이나 예술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왜일까? 우리에게는 탈춤 등의 전통놀이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풍자와 해학의 씨앗을 품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실 필자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95년생인 서울출생 필자는 마당놀이 같은 전통연희극을 본 기억이 전무하다. 말 그대로 공부할 때 달달달 외우기만 했지, 우리 것이라고 해도 실제로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수림뉴웨이브 마지막 공연을 통해 ‘우리의 것’이 무엇인지 아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수림뉴웨이브의 한 해를 장식하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연이었다. 이번 공연의 주인공은 ‘강민수’였다. 타악이라고 적혀 있지만 실은 소리를 메인으로 하는, 그리고 강민수가 속해있는 ‘우리소리 바라지’ 팀원과 함께 공연이 꾸려졌다. 공연의 제목은 <광대>.


강민수 <광대> 中 비나리 하는 장면 (사진=수림문화재단 제공)


역대급으로 무대 위가 풍성했다. 장구, 북, 아쟁, 징, 꽹과리 등의 악기뿐 아니라 백 스테이지처럼 꾸며 놓은 공간도 한편에 있었다. 여러 의상과 도구들이 기대감을 잔뜩 가지게 하였다. 그런데 첫 곡부터 알 수 있었다.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첫 곡부터 소리를 힘차게 뿜어내는데, 코앞에서 들어서 그런지 너무 좋았다. 그 뭐랄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그 앙칼짐과 중후함이 누가 따라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음색이 너무 좋았다. 발성, 음량은 물론이고. 알고 보니 공연자 '강민수'는 진도 다시래기 예능 보유자 ‘강준섭’ 선생과 명예보유자 ‘김애선’ 선생 사이에서 태어난 모태 국악인이었다.


1. 비나리 
2. 부포놀이 
3. 단막창극 <뺑파막> 심봉사 놀이, <독경(진도다시래기)>
4. 바라지 <생사고락(제비노정기)>
*함께하는 예술가 
- 아쟁, 꽹과리 : 조성재
- 대금, 북 : 정광윤
- 장구 : 이준형
- 태평소, 피리 : 오영빈


위 순서대로 공연이 진행되었다. 사실 사투리 때문인지 정확히 가사가 귀에 꽂히진 않았지만 그 리드미컬함과 시원한 목소리는 자연히 관객들의 흥을 돋우었다. 특히 추임새? 라든가 함께하는 팀원들의 너스레가 들어가니 뭔가 엄숙한 분위기보다는 마당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사회자 분의 몫도 컸던 것 같다. 강민수를 잘 아는 후배로서, 강민수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분위기를 유들하게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관객도 시원하게 웃고 떠들며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단연코 백미는 강민수의 분장쇼였다. 공연 제목 <광대>와 너무나도 어울리게, 매 곡마다 다른 의상으로 갈아입었는데, 분장하면서 사회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폼이 너무 웃겼다. 그 특유의 유머러스함은 확실히 선천적인 게 분명했다. 비나리에서 부포놀이로 의상을 갈아입을 때 눈길이 갔던 건, 상모처럼 생긴 위에 털이 달린 모자였다. 부포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두루미털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타조털로 만들어 색을 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모양새가 굉장히 요물이다. 마치 괴물 입처럼 공연자가 움직일 때마다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한다. 소리를 하면서 꽹과리를 치고 발로 스텝을 밟으면서 머리 위 털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게 정말 힘이 많이 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으면서 포즈를 하나하나 다 지어주고, 관객으로서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다. 


부포놀이를 하기 전, 무대 한편에서 분장을 하는 강민수 그리고 사회자


그리고 대망의 '진도 다시래기'가 펼쳐졌다. 아까 언급한 강민수의 아버지가 이 진도 다시래기의 예능보유자이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이라서 공연자가 하는 설명을 귀를 쫑긋하며 듣고 있었다. '진도 다시래기'라고 하면은 진도에서 행해졌던 초상집에서 하던 연희극을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초상집에서 웬 연희극?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내용을 들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연극에는 앞을 보지 못한 봉사와 만삭의 아낙네가 나온다. 둘의 티키타카 또한 별미인데, 마지막에 만삭의 아낙네가 결국 아기를 낳는다. 그런데 이 아기가 봉사의 아기인지, 잠깐 등장하는 무능한 중의 아기인지 모른다 할 때 상주를 닮았다 하며 아기를 상주에게 건네고는 다시래기가 끝이 난다. 이는 한 생명을 보내는 자리에서, 다시금 새 시작이라는 의미를 품고 초상집의 분위기를 유연하게 하고 서로 위로를 하며, 돌아가신 분도 애도할 수 있는 아주 기가 막힌 장치가 아닌가 싶다. 


진도 다시래기의 한 장면을 연기하는 '강민수' (사진=수림문화재단 제공)


사실 나도 친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가 가늠하기 어려웠었다. 예기치 못한 죽음이기도 했고, 우리도 준비가 안 되었는데 누가 누구를 위로한단 말인가.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건 어렵지 않다. 최대한의 내가 할 수 있는 한 크게 기쁘다고 이야기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한 생명을 떠나보낼 땐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지 또 떠나보내야 할지, 또 위로해야 할지. 우리는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조상들은 음악과 춤, 이야기 등의 예술로 이를 승화시키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다. 해학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사실 '해학'이라는 말이 단어가 어렵게 생겨선지, 직관적으로 잘 와닿진 않았다. 그러나 진도 다시래기를 보면서 해학의 힘을 여실히 느꼈다. 봉사의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걸음걸이, 그리고 만삭 아낙네와의 호흡, 그리고 그 자리에 맞게 변형되는 즉흥성. 강민수는 봉사의 걸음걸이를 연기하면서 비하가 아닌 과장된 것이라고 언급하는데, 사실 해학의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여러 번의 비극을 통해 웃음 실소를 유발하는 것이기에 그 전통이 잘 남아있는 듯했다.


마지막으로는 강민수가 속해있는 바라지의 곡 <생사고락>이 펼쳐졌다. 이번에는 네 명의 소리꾼들이 북을 잡고 제비를 흉내 내면서 소리를 하는데, 이 또한 너무나도 신명 났다. 마지막 곡다운 통쾌함이었다. 


마지막 곡, 바라지 <생사고락>을 열창하는 장면 (사진=수림문화재단 제공)


'우리의 것'이라고 하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우리의 것이면, 바로 옆에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언제든지 되돌아보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더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찾지 않고, 즐기지 않으면 '우리의 것'은 언젠가 사라져 있을 것이다. 이게 비단 잊힌다는 뜻은 아니고, 목조건물이 언젠가 퇴화되어 땅으로 돌아가는 순리처럼 '우리의 것' 또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질 운명을 타고났다. 그래서 지금 내 옆에 있을 때 더 바라봐주고, 지켜봐 주어야 한다.
 
 

우리는 점점 시간과 정성을 들여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꼭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가령 애도와 같은, 애도는 혼자서 또는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함께 진득이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들을, '우리의 것'은 말 그대로 함께 해내곤 했다. 전통문화가 고리타분해 보일 순 있어도, 결국은 우리의 뿌리이다. 단순히 한국이 싫어서, 한국의 이 집단주의적 이기심이 싫다고 외면할 게 아니라, 우리의 것을 바라보다 보면 그 순수했던 첫 의도만큼은 남아있다. 함께 슬픔을 나누고, 함께 기쁨을 나누는. 또는 각종 부조리한 상황들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이런 것들은 '우리의 것'이 맞다. 이를 받아들이고 또 변화시키는 건 이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일 뿐이다.


어쨌든 바라보지 않으면 언젠가 떠나갈 '우리의 것'을, 잠시나마 붙잡고 즐기는 건 나쁘지 않다 생각한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음악을 듣는 것이다.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직관적인 음악, '국악'을 듣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것'을 가장 이해하기 손쉬운 방법이다. 특히 이번 공연과 같은 이야기, 장례문화, 음악 등이 모두 담겨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연을 보면 단연코 일석 삼조이다. 아쉽게도 올해 수림뉴웨이브는 이걸로 끝이지만, 이러한 좋은 기획으로 내년에 다시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 막 국악에 입문한 국린이로써, 귀도 더 트이고 견문도 더 넓혀 더 다양한 국악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수림아트에디터 수퍼(SOOP-er) 2기

*본 리뷰는 수림문화재단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받고 작성되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장꾸미 가득한 큰아버지 매력을 지닌 거문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