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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글쓰기

by 정하

빈 화면을 노려보는 작가의 고뇌에 대한 글을 참 많이도 읽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목표는 있지만, 전혀 공감할 수 없었던 이야기. 글을 술술 써 내려가는 방향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오히려 정반대였다. 새하얀 화면과 깜빡이는 커서는 근 몇 달간 본 적도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며칠 전 만난 선유는 '멍청한 글쓰기'라는 시간을 소개했다. AI가 글쓰기를 도와주기 시작하며 점점 자신의 문장을 완성하는 게 어려워진다 이야기했다.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멋들어진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본인 혼자서는 그런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듯한 아이러니. 점점 멍청해지는 기분.

그래서 매일 밤 일명 '멍청한 글쓰기'라는 시간을 지정해 글을 써보기로 했다고 했다. 감정을 쏟아내며 정리하는 일기와는 다르게 한 주제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는 글. 조금 더 논리적인 방향으로 블로그에 글을 서술해 나가는 방식은, 요즘 가장 행복을 느끼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녀는 말했다. 굳이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며 매일 같이 자신의 글쓰기 서랍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선유가 참 한결 같이 멋져서, 오랜만에 나도 새하얀 화면을 열어봤다.


오랜만에 마주한 화면은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깜빡거리는 커서도 마치 글쓰기의 창구처럼 느껴져 설레기도 했다. 오히려 글을 끝맺음 짓는 게 더 무서웠다. 시작은 매번 참 쉽지만, 그 끝에 무언가가 남아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 내가 행한 것들에 성과가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압박감. 두려움. 글뿐만 아니라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도 매번 그랬던 것 같다. 시작은 쉬웠지만 항상 마무리가 어려웠다.

그러나 선유가 이야기했듯이.. 일단 뭐가 됐든 오늘은 오늘의 글을 쓴다. 글이 별로여도, 마무리가 애매해도 문제없다. 왜? 이건 멍청한 글쓰기니까. 일단 '글'이라는 걸 써 내려가며 내 문장을 적어 나가는 것으로 만족해 본다. 덕분에 오늘 나는 몇 개월 만에 한 편의 글을 적었다.


000024.JPG 시즈오카 숙소에 스민 햇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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