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언어의 끝>
<<오늘도 서쪽 하늘에 해가 닿기도 전에 바람이 차가워졌다. 남편은 새로 짓는 글자의 일로 아침부터 집현전에 나갔다가 해 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지 괜히 걱정이 되었다. 어젯밤, 남편은 목소리를 낮춰 이렇게 말했다.
“집현전에도 귀가 붙었소. 누가 임금의 뜻을 따르는지 누가 명의 뜻을 따르는지 알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소.”
“대감은 어쩌시렵니까?”
“어찌하면 좋겠소?”
임금의 뜻을 따르라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투쟁은 무거운 것이다. 저잣거리 아낙들의 싸움은 험한 말과 욕설 정도로 끝나지만 점잖은 양반들의 싸움은 피바람으로 끝이 나기 마련이다. 선왕들의 일로 도륙이 난 가문이 이미 한 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가만히 한숨을 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편도 내 손을 잡고 한숨을 쉴 뿐이었다.
- 성화몽기 중 일부 발췌>>
지현은 굳이 시간을 들여 인터넷을 검색해 이태원의 식당을 찾아갔다. 독일 셰프가 운영한다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렌틸콩으로 만든 수프와 호밀빵에 햄을 잔뜩 넣어 만든 샌드위치에 맥주를 마셨다. 스피커에서는 10년 즈음 전 유행하던 독일의 유행가들이 흘러나왔다. 손님이 뜸한 사이 주방 밖으로 나온 셰프와 독일어로 20여분 수다를 떨었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한동안 내뱉지 못한, 그러나 익숙한 독일어를 마음껏 한 시간이었다.
두통이 사라지고 이제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겠다는 자신이 들 때 즈음 두 잔 째 바이스비어가 바닥을 보였다. 계산을 하고, 뛰어나온 셰프와 독일어로 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로 가득 찬 전철을 견디고 광화문 역 밖으로 나왔을 때 좀 전의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바람만 힘껏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찬 공기 속에서도 한복으로 한껏 멋을 낸 사람들이 추위를 참지 못해 동동거리며 그녀의 곁을 빠르게 지나갔다. 한복을 입은 사람 중엔 외국인들도 많았지만 어쩐지 지현은 자신이 그들보다 더 이곳에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다.
이주일동안 도서관을 찾았다. 오래전 신문을 읽고, 사건을 알아내고, 사건에 대해 설명한 책들을 읽었다. 생각해 보면 지현의 과거는 칼로 베이듯 잘려 나간 셈이었다. 과거의 어떤 일들이 부모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그런 부모가 지현을 키웠겠지만 지현에게는 현재만 있을 뿐이었다. 학교에서 역사를 배웠지만 ‘그들’의 역사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시민권을 얻을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엄마의 반대 때문이었지만 지현의 마음속에도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가 지나는 넓은 길을 지나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흥겨운 얼굴의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몸을 움직여야 하는, 가게들이 늘어선 좁은 거리를 걸었다. 서서히 경사가 지기 시작하면서 작은 카페와 갤러리, 소품점등이 눈에 들어왔다.
<00 공방>, <다락정> 같은 한국어 간판부터 <Starbucks>, <Nonfiction Samcheong> 같은 영문 간판도 보였다. 크기도 다르고 위치도 다른 간판들은 어떻게든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현은 간판들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동네를 오가는 작은 버스를 탈까 잠시 고민하다 내쳐 걷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이 길을 걸어 오르지 않았을 거라 지현은 확신했다.
그런데 굳이 ‘집’을 물려준 이유는 뭘까, 지현은 걸으며 생각했다. 이제 일주일에 세 번 집안을 정리하는 분들이 방문했다. 여성 두 분과 남성 한 분이다. 여성들은 주로 집 안쪽에서 청소를 하고 주방을 관리했다. 지현은 집에서 아무것도 해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이 준비해 놓은 야채나 과일들은 무른 채 버려졌지만 어김없이 새로운 것들이 냉장고를 채웠다. 이따금 꺼내 먹는 견과류나 과자, 치즈들도 건너 뜀 없이 자리를 채웠다. 와인과 위스키 컬렉션은 훌륭했다. 남성은 정원과 그 밖의 업무를 담당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몇 시에 출근하고 퇴근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확한 것은 지현이 문을 열어줄 때만 들어오고 지현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후에 퇴근한다는 점이었다.
“일 끝나셨음 그냥 가셔도 돼요. 전 열쇠 있어요.”
그녀들이 있건 그렇지 않건 지현은 무거운 대문을 직접 따고 들어왔지만 그녀들은 괜찮다고만 할 뿐이었다. 며칠 전엔 늦은 시각 집에 오는 길에 동네 작은 레스토랑에 들른 적이 있었다. 조리와 서빙을 혼자서 하고 있던, 지현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사장과 말이 꽤 잘 통해서 와인까지 한 병 마시며 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열한 시가 넘어 도착한 집에 그녀들이 있는 것을 보고 어스름 취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들은 지현을 보자마자 바로 집을 나섰다. 혹시 카메라 같은 것을 달아 둔 것이 아닐까 탐지기까지 구입해 집 안 구석구석을 훑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휴.”
언덕이 가팔라지면서 나무가 삐죽이 밖으로 솟은 담장들은 계단처럼 위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걷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가끔 검은 차들이 조용한 소음을 내며 곁을 스칠 뿐이었다. 그리고도 한참을 더 걸어 집 앞에 도착했다. 외투 안 쪽으로 땀이 차올랐지만 얼굴은 강한 바람 때문에 딱딱하게 굳어갔다.
묵직한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대낮처럼 환한 정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을 두르고 있는 전구들이 깨끗하게 손질된 채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집 안에서도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아직 그녀들이 안에 있는 것이다. 지현은 계단을 올라 아래를 바라보며 우뚝 섰다. 발아래로 보이는 촘촘히 작은 불빛은 정원의 밝은 빛과 대비되어 마치 머리를 조아리는 것처럼 보였다. 밝은 정원 바깥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창고가 있는 곳이다. 그 불빛 때문에 말라버린 연못이 또렷이 보였다.
“월동준비인가.”
지현은 잘 다듬어진 잔디를 지나 연못가로 다가갔다. 오늘 작업을 끝낸 것인지 안에는 아직도 물기가 남아 있었다. 옆으로 길게 놓인 데크 위로 나뭇잎 몇 개가 구르고 있었고 언젠가 사용됐을 철제 테이블 일부가 밖에 세워져 있었다. 창고에서는 뭔가를 두들기는 망치 소리가 났고 의자 몇 개가 창고까지 이어지는 길 위에 세워져 있었다. 한동안 이곳에서 파티를 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1년 안에는.
지현은 천천히 잔디를 지나 집 쪽으로 걸어갔다. 불이 꺼진 2층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1층 정면의 벽을 따라 전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응접실과 식당이 있는 왼쪽 창 몇 개는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건물의 중앙, 문을 열면 밖으로 바로 빠져나올 수 있는 구조의 여닫이 문 안쪽으로는 두꺼운 커튼이 절반 정도 내려와 있었다. 유리가 아닌 곳은 전체적으로 크림색과 회색이 섞인 대리석이 붙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사용했다는 방 밖으로도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아마 스탠드의 불을 켜둔 모양이었다. 현관과 이어진 복도를 지나 오른편이 할아버지가 생활하던 방이 있었다. 지현도 이미 그 방을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책상과 테이블, 침대가 있는 간소한 방이다. 나머지 공간은 대부분 책이 차지하고 있었다. 흔한 컴퓨터조차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할아버지 방 창문과 비슷한 높이의 벽이 눈에 띄었다. 나머지가 크림색과 회색 대리석이었던 것과 달리 그 부분만 유독 크림색이 많고 새것처럼 보였다. 손을 벌려 대충 넓이를 가늠했다. 기억 속의 할아버지의 방보다는 벽이 더 넓었다. 건물을 돌아 온실로 이어지는 길로 접어들었다. 벚나무가 열을 맞춰 있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들어오셨습니까?”
남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자 청색 장화를 신고 청바지에 주머니가 많은 회색 점퍼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사다리를 손에 든 어정쩡한 자세였다. 지현은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남자가 지현이 섰던 자리 옆에 사다리를 놓고 위로 올라갔다. 꺼져 있는 작은 전구를 꺼내고 새 전구를 갈아 끼웠다. 불이 켜지자 벽의 상태가 더 자세하게 보였다. 집 앞에서 봤던 것처럼 좀 더 크림색이 많이 섞인 새로운 대리석이 바닥에서 1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사다리를 내려왔다.
“식사는 하셨어요?”
지현이 묻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퇴근하고 집에 가서 먹어야죠. 오늘 일은 이걸로 끝입니다.”
지현이 현관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두 명의 여성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잠시 후 세 사람을 태운 승용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에 서서 지현은 차가 골목을 돌아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