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의 자세
최근 홍콩 여행을 다녀왔다. 홍콩은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 중 하나다. 이번이 세 번째 홍콩 여행이니 많이 가보진 않았지만 갈 때마다 좋은 느낌이다.
돌아보니 인생의 분기점이랄까 변곡점이랄까, 좋은 쪽으로 삶이 변하는 시기에 우연히 홍콩 여행을 했다. 그래서 더 특별한 느낌. 홍콩을 다녀오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나만의 미신도 생겼다. 홍콩 완전 호감.
홍콩을 좋아하는 데는 아무래도 홍콩 영화가 큰 영향을 끼쳤다. 요즘 젊은 세대에겐 홍콩 영화가 낯설겠지만, 우리 세대는 한국 영화보다 홍콩 영화를 더 많이 보며 자랐다. 당시에는 홍콩 영화의 인기가 어마어마했다. 유덕화, 장국영, 주윤발 같은 홍콩 스타들이 우리나라 CF를 찍을 정도였으니까. 홍콩 영화는 아시아는 물론 서구권에서도 잘 나갔다.
홍콩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자란 사람으로서 처음 홍콩에 갔을 때 느낀 흥분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가는 곳마다 홍콩 영화가 떠올랐다. <중경삼림>, <화양연화>, <아비정전>.... 홍콩 영화에서 본 공간을 걷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황홀해졌다. 허름하고 지저분한 뒷골목, 화려한 간판, 창밖으로 빨래를 널어놓은 고층 건물의 생경한 풍경 등 모든 것이 신선하고 즐거웠다.
복잡한 홍콩의 건물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트램을 타고 2층에 올라가 앉아 창 밖으로 흘러가는 도시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다. 여행지에서 사진을 안 찍는 편인데 첫 홍콩 여행에선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다. 홍콩이란 도시의 풍경은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풍경이다.
첫 홍콩 여행 이후 10여 년이 지났다. 처음 같은 흥분은 당연히 느끼지 못했지만 이번 홍콩 여행도 너무 즐거웠다. 이번엔 이전 여행에서 가보지 않았던 동네를 둘러봐서 좋았다. 요즘 홍콩 젊은이들이 많이 간다는 ‘타이항’에도 가고, 한적한 바닷가 마을 ‘케네디 타운’, 우리나라의 힙지로(을지로)를 떠올리게 하는 ‘삼수이포’를 구경했다.
아, 그 유명한 ‘익청 빌딩’도 보았다. 익청 빌딩은 사진으로 워낙 많이 봐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막상 마주하니 박력 넘치는 위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게 홍콩이구나 싶은 풍경이었다. 문득 그 안에서 살아가는 홍콩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더불어 다른 사람의 일상을 이렇게 구경거리로 관광하는 것에 대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홍콩 여행의 모든 것이 좋은 건 아니다. 맘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 그건 바로 음식이다.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 그 나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을 경험하는 건 여행의 큰 즐거움 아니겠는가. 평소 여행은 그 나라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내게 홍콩은 실망감을 안겨주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전 두 번의 홍콩 여행에서 음식 때문에 고생했던 터라 이번엔 준비를 좀 했다. 우선 내가 맛없는 가게만 들렀다는 생각에 서치를 했다. 현지인에게 인기 있는 맛집, 한국인에게 인기 있는 맛집, 미슐랭 맛집, 숨겨진 맛집.... 온갖 추천을 받아 구글맵에 표시해 두고 여행 내내 찾아다녔다. 그리고 결론은 홍콩 음식은 역시 나랑 맞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번 홍콩 여행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기내식으로 나온 ‘비빔밥’이었다.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덧붙이면, 홍콩 음식은 아무 잘못이 없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입맛의 문제다. 홍콩은 미식의 도시로 불리는 음식의 천국이다. 단지 내게 맞지 않을 뿐이다. 홍콩 음식에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향이랄까 향신료랄까, 뭔지 모를 냄새 때문에 잘 못 먹겠다. 심지어 맥도날드에서 파는 햄버거에서도 향이 난다. 그리고 홍콩 음식은 내 입에 너무 기름지고 느끼하다. 김치가 간절해지는 맛이랄까. 외국 여행할 때 김치를 챙겨 가는 사람을 보면 이해가 잘 안 갔는데 이제야 그 마음을 알게 되었다. 홍콩 여행할 땐 주머니에 김치를 넣어 가지고 다녀야 한다고 본다. 아아, 다 필요 없고 진심 한식이 짱이다. 이번에 보니 홍콩에도 한식당이 꽤 많더라. 다음에 또 홍콩에 간다면 한식을 주로 먹을 예정.
음식이 이렇게 안 맞는데도 홍콩에 또 가겠냐고 물어본 다면 내 대답은 “예스”다. 식당에 갈 때마다 실망을 안겨 준 홍콩이지만 그래도 또 홍콩에 가고 싶다. 하나가 싫으면 전체가 다 싫어지곤 하는 원래 내 성격대로라면 “다시는 안 가”라고 했을 텐데, 의외의 대답이라 나도 조금 놀랐다. 그만큼 홍콩은 내게 매력적인 도시다. 너무너무 재미있다.
홍콩을 대하는 마음처럼 살고 싶다. 살면서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참 많지만 그럼에도 이 여행이 또 하고 싶을 만큼 즐거운 것이었으면 좋겠다.
100퍼센트 만족스러운 삶은 없다. 저마다의 불만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게 삶이다. 그럼에도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홍콩을 즐기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