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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Nov 08. 2018

가장 순수한 의미의 행복

영화 <베일리 어게인(A Dog's Purpose)>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가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베일리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견생'은, '가장 순수한 의미의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 '개로서의 삶'은 가장 자기 스스로의 삶, 특히 '현재'의 내 모습에 가장 충실한 삶이다.
 이는 영화에서 베일리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영화에서 베일리와 함께하는 여러 인간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흘러간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정작 행복해야 할 자신의 '현재'를 망친다. 베일리에게 그런 인간은 '미스터리' 그 자체다. 도대체 인간은 왜 슬퍼하는지, 왜 사랑하면서도 이별하는지.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 행동들, 아니 어쩌면 같은 인간끼리도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그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앞을 내다볼 수도 있고, 지나온 뒤를 돌아볼 수도 있는 건 '만물의 영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만이 가지는 특권이지만, '개'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기행'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사유하는 능력'은 인간을 이른바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준 원동력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어쩌면 인간은 사유를 통해 그 '만물의 영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행복한 삶'이라는 가치를 포기해버린 것은 아닐까. 태초의 인간과 신 사이에 그런 모종의 거래가 오간 것은 아닐까.


 그런 인류의 역사를 옆에서 거의 비슷한 시간 동안 함께해 준 동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개'다. 그리고 지금 소개할 영화 <베일리 어게인>의 영어 원제는 'A Dog's Purpose', '개의 목적'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개의 목적'이란 결국 '견생의 목적'이라는 말로도 치환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베일리 어게인>은 그 목적을 찾아 주인공인 개, '베일리'의 목소리를 빌어 이야기를 풀어낸다.


 원하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경험 법칙'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오래 걸려도, 경험해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이지만, 영화 속에서 베일리는 한 주기의 견생을 네 번 반복한다. 베일리는 레트리버로, 셰퍼드로, 그리고 자그마한 웰시코기로도 살아본다. 그 과정에서 베일리는 베일리로, 엘리로, 티노로, 버디로 살았으며 그 이름을 가지고 평범한 가정의 반려견으로도, 경찰견으로도, 유기견의 인생도 살아보았다.(*이후부터는 편의를 위해 개의 이름은 '베일리'로 통칭하겠습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몰라도 베일리는 죽은 뒤 다시 태어나도 전생에 만났던 자신의 주인들을 잊지 않는다. 마치 배낭 하나만 매고 혼자서 세계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는 여행자처럼 베일리는 그 생애에 만나게 된 주인과 함께한다. 그렇게 매 견생마다 바뀌는 자신의 삶의 모습, 또 자신이 만나게 되는 인간의 '인생'을 통해 베일리는 한 마리의 '개'로써 살아가는 삶의 목적에 대해 고찰한다.


 영화 <베일리 어게인>을 보면, 개로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어떤지, 또 개의 입장에서 바라본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한다. 조시 게드의 익살스럽고 때로는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내레이션과 베일리로 분한 네 마리의 개들의 인간만큼이나 풍부한 표정 연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 각자가 마음속에 품은 또 다른 '베일리'의 시선으로 스스로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내가 느낀 바는 이렇다. 베일리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견생'은, '가장 순수한 의미의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 '개로서의 삶'은 가장 자기 스스로의 삶, 특히 '현재'의 내 모습에 가장 충실한 삶이다.

 이는 영화에서 베일리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영화에서 베일리와 함께하는 여러 인간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흘러간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정작 행복해야 할 자신의 '현재'를 망친다. 베일리에게 그런 인간은 '미스터리' 그 자체다. 도대체 인간은 왜 슬퍼하는지, 왜 사랑하면서도 이별하는지.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 행동들, 아니 어쩌면 같은 인간끼리도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그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앞을 내다볼 수도 있고, 지나온 뒤를 돌아볼 수도 있는 건 '만물의 영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만이 가지는 특권이지만, '개'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기행(奇行)'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의 말미에서, 네 번의 견생을 경험한 베일리는 관객들에게, 인간에게 이렇게 말한다.


'개로 살면서 느낀 건 딱 하나야. 이 순간을 즐기면서 살라는 거.'


  어찌 보면 그리 특별할 것은 없는 문장이다. 과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나온 'Carpe diem'이나, 'seize the day'와 같은 유명한 격언들을 통해 인간은 현재를 즐기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해 오래전부터 설파해 왔다. 그럼에도 이 말은 계속해서 거대한 무게로 다가온다. 어떠한 말이 격언이 되는 이유는, 현재의 내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말이 마음에 새겨지는 것일 테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행복함보다는 불행함을 느낄 때가 더 많다. 일생동안 인간의 머리를 스쳐가는 모든 생각의 말로는, 대체로 걱정과 불안을 야기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견생'을 '가장 순수한 의미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인간들이 말하는 '현재에 충실한 삶의 중요성'이란, '사유의 결과물'이다.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해보고, 지나가 버린 과거에 집착하며 후회하고 우울해해보고 나니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개들은 '행복하기 위해'사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말 그대로,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한 것'이다. 이 순간을 즐기며 살라는 베일리의 말은, 현재의 행복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집착 역시 사유의 산물이다. 현재의 행복에 무조건적으로 집착하다가, YOLO라는 말에 너무 빠져서 사는 사람이 끝없는 방탕과 방종의 나락에 빠지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본다.

 탁자 밑으로 몰래 건네주는 베이컨 한 조각에, 주인이 멀리 던져주는 바람 다 빠진 공에, 아름다운 저녁놀 풍경에서도 행복을 발견하는 베일리의 모습은 정말 '순수한 의미의 행복'이 무엇 일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베일리가 여행한 네 번의 '견생'을 보며 우리는 웃기도 했지만 울기도 많이 울었다. 물론 베일리도 함께 하는 인간의 힘든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그래서 병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린 영화를 보며 베일리의 삶이 행복했다, 불행했다를 각자가 가진 '사유'의 잣대로 판단했지만, 누가 뭐래도 모든 생에서 베일리는 행복했다는 사실이다.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말은 정말 그런 태도로 삶을 살아간 베일리만이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베일리에게, 개들에게 고마운 것은 그 '행복'을 어떻게든 사람과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베일리'는 인간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러한 생각을 하는 인간의 '감정'을 읽는다. 그것이 우리가 반려견과 함께 살며 위로와 위안을 얻기도 하는 이유일 것이다. '베일리'는 인간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냄새와 같은 것들로 지금 사람이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인간이 행복할 때는 함께 기뻐하고, 불행할 때는 어떤 방법을 써서든 인간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한다. 그 사람이 당신의 주인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이기 때문에.



 개들은 그렇게 항상 같은 자리에서 사람을 바라보지만, 사유의 무게와 현실의 무게에 갇혀 지쳐버린 인간은 그런 친구에게 화를 내고 심지어는 내다 버리기도 한다. 사실 버렸다는 말도 너무 웃긴 말인 것 같다.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이 다른 생명을 '내 것'이라고 소유하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인간은 상황에 따라 나와 다른 누군가를 친구로 여기기도, 금세 배신하여 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 역시 '사유'의 결과일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앞일을 어떻게 예상하던 그것은 결국 어떤 한 생명체의 알량한 작은 생각일 뿐이다. 얼마나 나은 삶을 살겠다고 우리는 같은 사람에게도, 당신을 친구라고 믿고 따르는 반려견에게도 마음에 비수를 꽂는 걸까.


 영화를 보면 베일리는 자신을 버리고 저 너머로 멀리 사라지는 주인의 차를 바라보며 '여기서 집까지 찾아오라는 놀이는 좀 너무한데...'라고 생각한다. 평소 같았으면 반려견을 버리는 주인을 욕하거나 꼬질꼬질한 모습을 하고 버려진 개의 모습을 바라보며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는 주인을 보는 베일리의 내레이션은 좀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남겼다.

 으리으리한 집에서 좋은 사료 먹고 자라는 부잣집 강아지를 보며 '개팔자가 상팔자'라고 말하는 우리에게는 그런 유기견의 모습이 참으로 가엾고 불쌍할 테다. 하지만 우리가 유기견이라 말하는 그 개들, 정작 그 개들은 자신들이 버려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들에겐 함께였던 친구 하나가 사라졌을 뿐일 것이라고 말이다. 버려지고 새 주인을 만나고 행복해졌다고 뿌듯해지는 그 사실조차도 결국은 '인간의 입장에서'의 해피 엔딩일 것이라고 말이다. 돈 많은 주인을 만나던 가난한 주인을 만나던, 그 개에게는 '주인'을 만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 행복일 것이다. 개들의 행복은 축적한 부가 만들어내는 미래에서 오는 것이 아닌,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함께 있는 사람과의 깊은 '유대'에서 오는 것일테니까.



 물론, 반려견을 버리는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다.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명을 맡았다가 버리는 행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사료가 비싸서, 돈이 많이 들어서 반려견을 유기견으로 만드는 일은 어쩌면 반려견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기에 벌어지는 일들일 것이다. 정말 그 반려견을 자신의 '친구'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그 반려견과 마음을 터놓고 감정을 나눴다면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 영화에서 '베일리'를 계속 '보스독', '버디'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정말 마음을 나누는 소년 '이단'의 모습을 보며 우리 주변의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들의 삶도 이런 모습이기를 내심 바라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영화의 마지막에 네 번의 견생을 돌고 돌아 이제는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 '이단'을 다시 만나는 베일리의 모습은 정말 큰 감동을 안겨줬을 것이다. 평생 몸으로, 마음으로 자신의 곁을 지키다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을 다시 만나는 것, 반려견을 키워본 모든 보호자들이 한 번쯤 하게 되는 행복한 상상 아닐까.


 이런 다양한 생각을 하며 본 영화 <베일리 어게인>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을 확인하려 시계를 보는데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같은 공간을 끊임없이 뱅뱅 도는 저 분침과 시침처럼, 우리 인생은 무한한 하루의 반복이다. 그 지루하게 반복되는 하루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고 사는 것일까.

 그렇게 따지면 베일리는 전생을 모두 기억한 채로 같은 견생을 네 번이나 살았다. 우리처럼 생각한다면 그 생은 얼마나 지겨울까. 하지만 베일리는 전혀 그 생애들을 지겹게 여기지 않았다. 다를 것 없는 똑같은 견생 같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만난 여러 사람들, 개들을 기억하고 그 안에서 매일 새로운 행복을 발견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더 크게는 하나의 생명으로써 똑같이 주어진 한 번의 생을 살아 내며 꼭 새겨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었다.


p.s 결국 나도 사유의 저주에 갇혀 버린 인간일 뿐인가 보다. 사유를 통해 '행복'을 만드는 인간이 되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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