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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Jun 21. 2017

아아, 우리는 민중의 사랑스런 개새끼로소이다

영화 <박열>

*본 영화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 뒷장 한편에 실린 짧은 시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시를 읽어보았다. 참으로 강한 힘이 느껴지는 시였다. 구절, 구절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떨려왔다. 끝까지 읽고 나서는 황홀경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내 가슴속 피는 춤을 추었고, 알 수 없는 어떤 진한 감동이 나의 모든 생명을 고양시켰다.

-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나는 나> 중에서

  

 후미코, 이름마저 문자(文子)인 이 일본인 여성은, 어느 조선 청년이 적은 시를 한 글자, 한 구절 꼼꼼히 읽으며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첫 눈에 반해버린다. 그 청년의 이름은 박열. 후미코는 외모나 조건이 아닌 시에 나타난 박열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그것을 이루려는 기개에 반한다. 다짜고짜 그의 앞에 나타나 동거하자고 제안하는 그녀의 모습은 전혀 퇴폐적이거나 문란해 보이지 않는다. 한 편의 시가, 그 안에 담긴 이데올로기가 자양분이 된 그들의 사랑은 현대인들의 속물스럽고 퇴폐적인, 천편일률적인 사랑과는 다르다. 그렇기에 더 낭만적이고, 그렇기에 더 안타깝다.

 후미코에게 콩깍지를 단단히 씌워 버린 박열의 시의 제목은 <개새끼>. 역시나 젊은이의 기개와 비분강개를 표출하는 데에는 시원한 욕 한마디가 제격이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 박열, <개새끼>

 

 박열은 자신을 거리를 떠도는 하잘 것 없는 개새끼로 묘사하지만, 그의 시는 불의를 일삼는 권력층에 저항하려는 당찬 의지를 뿜어낸다. 모든 정치조직과 권력을 부정하는 아나키즘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두 젊은 아나키스트 남녀는 그렇게 만나고 아름다운 공원이나 카페가 아닌 감옥에서, 재판정에서 그들만의 러브 스토리를 펼쳐나간다.

 

 우리의 역사를 가장 우리의 목소리로 버무려내는 재능을 가진 이준익 감독은 전작 <동주>와 지금 소개하려는 영화 <박열>에서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의 청년들을 다뤘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에서 고요한 흑백의 화면과 시를 통해 청년 윤동주의 한없는 부끄러움을 담아냈다면, <박열>에서는 부정한 권력에 항거해 스스로를 내던지고 불사르는 조선 청년 박열의 모습을 때로는 해학으로, 때로는 감동으로 유쾌하고 통쾌하게 그려낸다. 한국인만이 알 수 있는 우리만의 정서를 가장 잘 자극해내는 이준익 표 유머는 <황산벌>, <평양성>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아직도 살아있었다. 그리고 실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보는 듯한 이제훈과, 최희서 두 배우의 연기는 우리를 웃게도, 눈물짓게도 했다.


 박열의 모습은 <암살>이나 <밀정>에서 우리가 보았던 일제 시대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가들과는 다르다. 박열과 그의 단체인 '불령사'의 회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무정부주의는 모든 정치조직과 권력을 부정한다. 그들은 조선을 되찾고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위해 그를 억압하는 권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들은 임시정부나 독립군들과 같은 애국충정의 마음보다는 국가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자체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박열과 불령사 단원들은 권력을 미워할 뿐, 일본의 민중들까지 미워하지는 않는다. 개인을 억압하는 군국주의 세력에 반대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조선인이던 일본인이던 그들에겐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내내 스스로 문명국임을 자처하는 일본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 영화에서 '문명국'이라는 말은 일본 제국주의 권력의 위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단어다. 일본 내각은 관동 대지진으로 흉악해진 민중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죄없는 조선인들을 선택한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타고 불을 지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자경단과 군대들의 전국적인 조선인 학살을 야기한다. 여러 인물들 중에서도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는 악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조선인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일본 내각이 예상한 것보다 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죽어나가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염려한 일본은 '문명국'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고민에 빠진다.

 미즈노는 조선인들에게는 영웅, 일본인들에게는 원수가 될 자를 만들기로 한다. 한 사람에게 큰 죄를 뒤집어씌워 공정하고 합리적인 수사, 법에 따른 공정한 재판을 하는 척 하며 대외에 그들의 과오를 숨기고,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악질 불령선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며, 상해에서 폭탄을 반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박열은 그 과정에서 희생자가 될 위기에 처한다.

(참고로,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는 앞선 3.1운동 직후인 1920년 사이토 신임 총독과 함께 조선을 방문했다가 강우규 의사의 폭탄 의거로 죽을 뻔 했다. 의거가 미수에 그치며 그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여기서 박열은 피하기는 커녕 의연하게 맨 몸으로 제국주의 권력과 맞서고자 한다. 검사의 심문에 오히려 내가 황태자를 죽이려 했다며, 대역죄로 기소하라고 당당하게 나선다. 박열은 대역죄로 기소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의 재판이 조선과 일본에서 큰 화제로 떠오를 수 있고, 사형 선고를 받고 당당히 죽어야 부정한 권력의 탄압으로 지쳐버린 민중에게 거대한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가네코 후미코는 어떻게 그와 이 길을 함께 가게 되었는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앞서 동거를 하며 함께 동거 서약을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첫째, 동지로서 동거한다.
둘째, 운동 활동에서는 가네코 후미코가 여자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셋째, 한 쪽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길 경우,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둔다.


 이 동거서약은 박열 못지 않게 가네코 후미코가 얼마나 강직한 여성인지를 알게 해준다. 후미코는 영화 초반에 박열이 자신에게 폭탄 입수 계획을 숨겼다는 사실을 알자 가차 없이 그의 빰을 후려친다. 박열이 후미코가 여자임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박열은 후미코와의 동거 서약을 끝까지 지킨다. 무조건 후미코를 보호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의 이상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그녀도 동참하고 싶다면 그 뜻을 꺾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후미코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사상적 동지이자, 열렬한 사랑의 대상인 박열과 끝까지 함께하기로 한다.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는 그녀가 작성한 옥중 수기 <나는 나>에 잘 나와 있다. 영화를 더 깊이 있게 감상하기 위해 나는 미리 그녀의 수기를 읽었다. 영화에서 박열과 후미코를 심문하는 검사는 일본인임에도 황태자 암살을 모의했다는 후미코를 미친 사람으로 여기다가,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행동을 어느 정도 납득한다. 그녀의 수기를 읽으면 참으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일본 사회 속에서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를 200% 즐기고 싶다면 그녀의 수기를 꼭 읽어보길 추천드린다.


 각설하고 그들은 옥중에서 혼인 신고를 한다. 동거를 했던 그들이 굳이 혼인 신고를 한 이유에서 감동은 절정에 이른다. 대역죄로 기소되어 그들이 부부가 아닌 채 사형을 당하게 되면, 박열의 시신은 수습되어 가족에게 보내지지만, 이렇다할 가족이 없는 후미코는 시신이 어디로 가게 될 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후미코의 시신을 수습하여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함께 묻히기 위해 박열은 그녀와 혼인 신고를 하려 한 것이다.


 아아, 육체적인 사랑 만큼이나 정신적인 사랑이 이리도 낭만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다니. 물론 나는 플라토닉 러브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박열과 후미코가 플라토닉 러브를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신적인 교감이라는 토양에서 싹틔운 사랑이 이렇게도 건실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이 영화는 박열과 후미코를 통해 느끼게 해준다.


 이제 박열과 후미코에게 감옥과 재판정은 더이상 감옥과 재판정이 아니다. 그들이 함께라면 감옥은 그들의 신혼집이요, 재판정은 예식장이다. 그리고 재판정은 핍박받는 조선 민중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거대한 성토의 장이기도 하다. 박열과 후미코는 전통 한복을 입고 재판정에 나타나 부당하게 권력을 남용하는 일제의 악랄함을 고발한다. '문명국'이라는 일본의 위선은 오히려 약점이 되고, 박열은 그 점을 이용해 일본 내각과 맞선다. 박열은 '문명국' 일본 제국주의 권력에 대항할 무기로써 '재판 거부'를 이용해 권력을 제대로 골탕먹인다. 오히려 일본이 박열에게 '재판 거부'를 당하지 않기 위해 그를 구슬리고 달래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 유명한 사진이 등장한다.



  고향에 부모님께 보낼 사진을 찍고 싶다며 당당히 사진기 앞에 선 이 대역죄인들. 이들을 누가 대역죄인이라고 할까. 이들은 그저 한 쌍의 아름다운 신혼 부부처럼 보인다. 이런 거대한 일을 맞이하고도 이렇게 의연할 수 있는 이들의 용기와, 이 용기를 만들어 낸 열정과 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박열과 가네코를 제물 삼아 일본 민중의 분노를 억누르려 했던 일본 내각은 결국 이 사진 때문에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고, 결국 담당 판사와 내각이 총사퇴하게 된다. 박열과 후미코는 그들만의 해학과 용기로 제국주의에 분연히 맞섰다. 권력의 붕괴를 염원하던 박열과 후미코에게 이것은 훌륭한 성공이 아니었을까.


 박열과 후미코를 사형시킬 경우 닥칠 후폭풍을 두려워한 일본 내각은 두 사람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 이는 이들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권력의 은혜를 입다니. 후미코는 천황이 내린 은사장을 갈기갈기 찢는다. 그리고 후미코는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아직까지 그녀의 죽음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의문이 남아있다.) 그러나 박열은 죽지 않고 22년간 복역한다. 영화 마지막에 박열은 말했다. 끝까지 살아 제국주의 권력의 만행을 끝까지 폭로할 것이라고.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던것처럼, 결코 박열과 후미코는 실패하지 않았다. 박열은 해방 정국에서 외국 어딘가에 묻혔던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효창공원에 안치하는 등, 자신의 일을 다한다. 그 과정에서 아나키스트였던 박열은 반공주의 노선으로 갈아타게 되지만, 박열의 행보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이 영화 안에서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일은 이 리뷰에서는 묻어두도록 하자.


 박열과 후미코는 48년이라는 큰 시간을 사이에 두고 죽음을 맞이했다. 함께 고향에 묻히고자 한 두 사람은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가네코는 박열의 고향인 문경에 묻혔지만, 한국전쟁 도중 납북된 박열은 북녘 땅 평양에 묻혀 있다. 이 영화에 사용된 ost인 최승희 선생의 <이태리 정원>은 먼저 죽은 이가 사랑하는 이가 나중에 도착하길 기다리는 내용의 노래이다. 하루빨리 그들이 같은 땅에 묻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산넘고 물건너 임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 정원

어서 와 주셔요


- 최승희, <이태리정원>


 부정한 권력과 그에 대항하는 민중의 모습은 그 시대만의 유물은 아닌 것 같다. 민주주의 국가에 산다고 말하는 우리도 분명히 이 영화에서 본 것과 비슷한, 기시감이 드는 사건들을 목도하며 살아간다. 나는 영화 <박열>이 그저 일제에 항거하여 나라를 구한 순국 선열의 모습을 담은 영화가 아니라는 것에서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인격을 지닌 민중을 억압하는 옳지 못한 권력에 참고 울분을 삼키지 말라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떨쳐 일어나야 한다고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같아 이 영화가 새삼 더욱 고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의에 대해 누구보다 불량했고, 또 순수한 열정과 사랑을 보여주었으며, 누구보다 뜨거웠던 두 청춘 남녀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임에도 치마저고리를 입고, 같은 조선인들보다도 더 믿음직스럽게 탄압받는 조선의 민중을 대변해 준 가네코 후미코 양의 수기 <나는 나>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그(박열)는 내 손을 놓고 간다 방향의 전차를 탔다. 그를 보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듯이 중얼거렸다.
"기다려 주세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학교를 졸업하면 곧바로 우리 함께합시다. 그때는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에요. 결코 당신을 병으로 힘들게 하지 않을 거에요. 죽는다면 함께 죽읍시다. 우리, 함께 살고 함께 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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