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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Apr 11. 2018

진정한 초연함에 대하여

영화 <몬태나(Hostiles)>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가 제공한 시사회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원주민들은 단 한 번도 '내 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고향'이라고 말했을 뿐.


 이는 서구 문명을 기반으로 그에 발맞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준다. 어쩌면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앗아간 원주민들에 대한 블로커 대위와 미국인들의 증오도, '삶'에 대한 강력한 소유욕에서 발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주민들이 사랑하는 동료의 삶을 앗아가고, 내 삶을 앗아가려고 한다. 결국 부와 명예도 '죽음'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기에, '삶'은 우리가 가지는 가장 원초적인 소유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빼앗아가는 원주민들을 증오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넓은 광야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옐로우 호크 추장처럼 조금만 멀리서 크게 바라보면, 소유욕이란 참으로 하찮은 감정이다. 원주민들은 단 한 번도 영화에서 '내 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고향'이라고 말했을 뿐. 사랑하는 이를 잃는 상실감에 그들도 아파하지만, 그들은 미국인처럼 증오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자연의 섭리일 뿐.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함께인 이 순간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처음 영화 <몬태나>의 포스터를 보고는 자연스럽게 끝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한 편의 서부 영화를 연상했다. 사실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 분노의 추적자> 같은 복수극을 연상했다. 정의감 넘치는 보안관과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걸크러쉬가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여주인공, 그리고 머리를 곱게 땋은 인디언 추장까지.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 이 영화는 서부극이 맞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영화 <몬태나>는 화려한 액션으로 점철된,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서부극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조셉 J. 블로커(크리스찬 베일) 대위가 감옥에서 7년을 보내다 암에 걸린 인디언 추장 옐로우 호크(웨스 스투디)와 그의 가족을 고향인 몬태나의 '곰의 계곡(The Valley of the Bear)'으로 호송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블로커 대위는 평생을 군에서 보내며 아메리카 원주민들, 아니 그들의 표현으로 야만인들(Savages)과 싸웠고, 옐로우 호크는 그가 가장 증오하는 그의 '적'이고 '원수'였다. 이 영화는 그런 그가 원수와 뉴 멕시코에서 몬태나까지 1,000마일에 이르는 여정을 함께하며 바뀌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렇다 보니 매우 느린 템포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 러닝타임의 반 이상이 드넓은 광야를 정처 없이 횡단하는 블로커 대위 일행의 그림으로 채워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131분으로 러닝타임이 꽤 긴 편이어서 어쩌면 보는 사람이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끝까지 느리고 긴 호흡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블로커 대위 일행은 서부극답게 리볼버를 들고 코만치 족과 대결한다. 1800년대의 총격전이기에 총에 맞는 것보다 빗나가는 게 많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잘 맞지 않아서 더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쓰러진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 확인 사살을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서부 시대 총격전의 리얼함을 잘 살려낸다.



 이 영화에서 최고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등장한다. 로잘리 퀘이드(로자먼드 파이크)가 코만치 족에게 사랑하는 남편과 두 딸, 그리고 아기를 모두 잃는 장면이다. 혼자서 살아남은 로잘리가 바위 뒤에 숨어 인디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입을 꽉 움켜쥐어 틀어막는 장면은 로자먼드 파이크의 연기의 백미다. 영화 <몬태나>는 크리스찬 베일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의 연기 모두 훌륭했지만 특히 로자먼드 파이크의 연기가 인상에 깊게 남는다. 총에 맞아 피가 범벅이 된 아기의 포대기를 안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과 블로커 대위 일행에 의해 구출되어 옐로우 호크 추장과 그 가족을 처음 보고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도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모습, 죽은 코만치 족의 시체에 총알이 다 떨어졌는데도 미친 사람처럼 계속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 등은 보는 내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력은 느린 템포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영화에서 마지막까지 텐션을 놓을 수 없도록 훌륭히 이끌어갔다.


 물론 영화 <몬태나>에서 가장 주된 이야기이자, 사람들이 집중해야 할 부분은 주인공인 블로커 대위의 변화다. 영화는 하나의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미국 영혼의 본질은 억세고 고독하며 초연하고 살의에 찼다. 그건 지금까지 그대로 뭉쳐있다”

- D.H. Lawrence


 영국의 소설가 D.H 로렌스의 말이다. 이 문장은 블로커 대위의 모습에 그대로 오버랩된다. 척박한 서부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 싸워야만 했던 미국인들. 원주민들은 그들의 전우, 그들의 가족을 잡아 머리 가죽을 벗겼다. 그런 원주민들을 죽이고, 쫓아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블로커 대위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으로, 1800년대 후반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인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억세고, 고독하며 원주민에 대한 증오에서 발현된 살의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렇기에 그렇게 많은 원주민을 잔인하게 죽이고, 밧줄에 묶어 끌고 다녀도 언제나 조금의 감정 변화도 없이 초연하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주민들을 증오했다.



 그런 그에게 상부는 전역을 앞둔 그에게 마지막 임무로 그가 가장 증오하는 적, 옐로우 호크 추장을 몬태나로 호송할 것을 명령한다. 원주민 말에 능통하며 몬태나까지 가는 지리에 빠삭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블로커 대위는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지만 그의 상관은 이제 전역하고 나면 연금이나 기다리며 살아야 할 텐데, 전역 말미에 군사재판으로 불명예 전역을 하고 싶냐며 그를 협박한다. 어쩔 수 없이 블로커 대위는 부하들을 뽑아 몬태나까지 가는 여정에 나선다.


 몬태나까지 가는 여정은, 전역을 앞둔 블로커 대위가 지금까지 '군인'으로서의 인생을 정리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그가 심정적으로 변해가는 여정과 일치한다. 특히 블로커 대위의 절친한 동료인 상사 '토미'의 모습은 평생을 원주민과의 싸움에 바친 병사의 트라우마를 잘 표현한다. 곁에서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수많은 원주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토미'는 그러한 살육이 가능한 이유를 '익숙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죽음들을 마음속 한편에 쌓아두고 있었다. 영화 말미에 옐로 호크 추장에게 그가 죽인 수많은 원주민들의 목숨에 대해서 자신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을 거라며 추장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살육'이라는 행동에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잘 보여준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붓는 비는 증오와, 익숙함이라는 말에 감춰져 보이지 않았던, 휘몰아치는 그의 감정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무표정한 모습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총을 쏘아대던 블로커 대위에게도 그랬다. '억세고 고독하며, 초연하며 살의에 가득 찬' 미국 영혼의 본질의 기저에는 무고한 그들의 이웃을 잔인하게 죽이는 원주민들에 대한, 상실에 기반한 '증오'가 깔려 있었다.


 그런 미국인들이 의지할 곳은 그들이 믿는 신, 하느님뿐이다. 블로커 대위는 하느님도 이 곳은 들여다보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며, 블로커 대위 일행은 가는 길 내내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거대한 광야에서 나약하기만 한 미국인들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문명인들이 믿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마치 불교의 윤회 사상과 비슷하게,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원주민들이 수많은 미국인들을 잔인하게 죽인 만큼, 미국인들도 수많은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원주민이던 미국인이던 가리지 않고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블로커 대위는 결국 옐로우 호크 추장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문명화해야 할 야만인이 아닌, 삶에 감사하고 죽음에 슬퍼하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실 어찌 보면 원주민들도 할 말은 있다. 잘 살고 있던 그들에게 갑자기 찾아와 땅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쓰고 있는 건 미국인들 아닌가. 그런 그들에게 맞서 자신의 가족과, 부족을 보호하는 원주민들의 행동에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옐로우 호크와 그의 가족들도, 자신들이 태어난 '흙'으로 돌아가려는 것뿐, 서구 문명들의 억지스러운 땅따먹기 논리에 의해 자신들의 땅을 탈환하러 가려는 것도 아니다.


 우린 수많은 서로의 동료를 죽이며 살아왔다고 말하는 블로커 대위에게, 옐로우 호크 추장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그것은 크나큰 상실이지만, 그들은 흙으로 돌아간 것뿐이오."

 

 옐로우 호크 추장을 평생 증오해 온 자신과 달리, 순수하기까지 한 옐로우 호크 추장의 모습에 블로커 대위의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된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증오라는 말 아래 얼마나 지독히도 몸부림쳐 왔는가. 그리고 그 몸부림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던가.

 

 미국인들을 비롯한 서구 문명국가들이 산업화되지 않은 국가들을 식민지로 삼을 때 사용한 가장 큰 핑계 거리는 바로 '종교'였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땅에 처음 발을 들인 것도 다름 아닌 선교사들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을 핑계로 원주민들의 땅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았다.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인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몬태나에 도착해 죽은 원주민들을 묻어주려는 블로커 대위 일행에게 나타난 원주민 시체를 가지고 당장 꺼지라고 말하는 '땅 주인'의 모습은 오만한 서구 문명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서구인들에게 사유 재산을 늘리고 부를 증식하는 행위를 역시 '하느님'이 이 땅의 인간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이는 역시 서구 문명을 기반으로 그에 발맞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준다. 어쩌면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앗아간 원주민들에 대한 블로커 대위와 미국인들의 증오도, '삶'에 대한 강력한 소유욕에서 발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주민들이 사랑하는 동료의 삶을 앗아가고, 내 삶을 앗아가려고 한다. 결국 부와 명예도 '죽음'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기에, '삶'은 우리가 가지는 가장 원초적인 소유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빼앗아가는 원주민들을 증오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넓은 광야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옐로우 호크 추장처럼 조금만 멀리서 크게 바라보면, 소유욕이란 참으로 하찮은 감정이다. 원주민들은 단 한 번도 영화에서 '내 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고향'이라고 말했을 뿐. 사랑하는 이를 잃는 상실감에 그들도 아파하지만, 그들은 미국인들처럼 증오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자연의 섭리일 뿐.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함께인 이 순간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여정에서 블로커 대위는 토미처럼 자신을 괴롭히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전역 후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새로운 원동력을 얻는다.


 무엇이든 더 얻지 못해, 더 가지지 못해 패배 의식에 젖어 살던 요즘의 사람들에게 참으로 좋은 자극이 되어 줄만한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화면 전환에 디졸브를 많이 사용했는데, 넓은 광야에서 옐로우 호크 추장에게로 디졸브 되는 화면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로렌스가 말한 미국 영혼의 초연함은, 진정한 초연함이 아니었다. 거대한 증오 속에 '초연한 것처럼 보이기 위한' 초연함이었을 뿐. 거대한 세상 앞에서 정말 초연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옐로우 호크 추장과 아메리카 원주민 들이었다. 드넓은 자연처럼 초연하게 살 수 있는 힘은,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정말 멋진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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