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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결정, 그 힘과 그림자

자기 결정은 스스로에게 책임감을 강화하지만 동시에 나의 판단을 흐린다.

by 김지혜

버스를 내리니 비가 왔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기 전, 우산을 든 사람들을 보고 ‘비가 오려나’ 생각했지만, 집에 우산을 가지러 가기에는 귀찮았다. 결국 버스에서 내릴 즈음,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지하철역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지하철을 타기 전 잠시 고민했다.
‘우산을 살까, 말까?’
지하상가 곳곳에는 우산을 파는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잠시 상가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우산을 하나 샀다.

지하철을 다시 타고 몇 정거장을 지나 내릴 즈음, 비가 그쳤다. 괜히 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가랑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감정은 순식간에 바뀐다. ‘그래, 우산을 사길 잘했네.’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우산을 쓰고 약속장소로 가면서 새로 산 하얀 운동화가 젖을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순간 나는 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생각 났다. 비속을 걷는 건 언제나 나를 더 번거롭게 만든다. 무거운 가방에 노트북까지 들어 있는데, 이제는 우산까지 들고 다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비는 신기하게도 싫지 않았다. 비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우산을 사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내 기분을 바꿔 놓았다. 그 선택이 옳다고 믿고 싶었던 감정이 비가 오는 상황을 다르게 바라보게 했다.


내가 내린 선택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후회를 줄인다. 비가 오는 싫은 상황도 더 잘 마주하게하는 에너지를 준다.

책 쓰기 모임에 참여한 열두 명의 사람들도 그랬다. 모두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며 글을 써야 했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매주 숙제를 내고, 밤을 새워 글을 써야 했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들었다. 하지만 스스로 결심해서 온 사람과 누군가의 권유로 온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자기 결정으로 시작한 사람은 고비를 넘길 때 더 큰 인내심을 발휘했다. ‘내가 선택한 일’이라는 자각은 책임감과 끈기를 키웠다.



동시에, 자기 결정은 사실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스스로 내린 결정일수록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스스로 지워버린다.

우산을 샀던 날처럼, ‘내가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다’는 감정이 진실을 흐릴 때가 있다. 그날의 비는 우산 없이도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가벼운 가랑비였다. 평소 같았으면 우산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돈을 지불한 이상, 나는 억지로라도 우산을 들었다. 스스로에게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것이 바로 ‘매몰비용의 오류’다. 이미 투자한 시간, 돈, 감정이 아까워 틀린 결정을 고치지 못한다. 자기 결정은 스스로에게 책임감을 강화하지만, 동시에 ‘내가 결정했으니까 틀릴 리 없다’는 확신을 위한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새로운 정보나 타인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유연함이 사라진다.

어느날 친구를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난 기다리는 동안 몰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재킷, 시간이 촉박하다는 생각에 깊이 고민하지 않고 사버렸다. 집에 돌아와 입어보니 어딘가 어색했다. ‘이 재킷에 어울리는 블라우스가 없어서 그래’라는 생각에 핸드폰으로 어울리는 블라우스를 사려고 찾는다. 결국 잘못된 결정은 더 큰 소비를 부르고 있었다.

나의 결정에 대한 자기 합리화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채 빠르게 어울리는 블라우스가 없어서 라는 생각으로 전환해 버렸다.

나는 이런 패턴을 일에서도 반복했다. 일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매일의 일정을 채우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일은 애초에 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것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래도 이 일에서 배운 게 있잖아’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사실을 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결정들이었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한 결정들은 쉽게 반복된다. 내가 내린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느껴지는 감정을 나는 실패로 인식한다.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는 결국 잘못된 결정을 반복한다. 하지만 진짜 실패는 잘못된 결정을 붙잡고 더 큰 비용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자기 결정은 양면성을 가진다. 자기 결정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비가 오는 날 만 원짜리 우산 하나가 그동안의 비 오는 날의 감정을 덮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더 큰 에너지와 끈기를 가지게 하는 자기 결정의 힘을 믿자. 그럼에도 언제든 그 선택을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생각을 열어두자. 스스로의 감정을 간과하지 않고 바라볼 때 자기 결정은 고집이 아닌 성장의 도구가 된다.



김지혜 (Jane Jihye Kim)

글로벌 역량 강화/문화간 이해/외국인 한국 사회,비즈니스 문화 이해(영어진행)

퍼실리테이터/DEI trainer /영어 통역사/다양성과 포용성을 위한 문화 토크 커뮤니티 운영자

janekim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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