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에서 시작되는 세계
06화에서 우리는 스타워즈와 포켓몬이 50년, 100년을 이어온 비밀을 배웠습니다.
핵심 클러스터를 유지하고, 확장 가능한 여백을 남기고, 세대별 입구를 설계하는 것.
하지만 그런 거대한 세계관도 결국 어디서 시작할까요?
"은하계 저편에 제다이라는 기사단이 있다" "151마리의 몬스터를 모두 잡아야 한다"
한 문장입니다.
한 문장이 세계가 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한 문장은 무엇입니까?
많은 창작자들이 세계관 설계를 거창하고 복잡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방대한 연대기를 쓰고, 지도를 그리고, 수천 명의 인물 관계도를 짜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세계관의 시작은 그렇게 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고 구체적인 '심상(心象, Imagery)'에서 시작됩니다.
이번 장에서 우리는 가장 단순한 문장 하나에서 어떻게 거대한 세계관이 펼쳐지는지 그 순간을 목격할 것입니다.
지금 눈을 감고 다음 문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호숫가에 집이 한 채 있다."
아주 단순한 문장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을 듣는 순간, 여러분의 머릿속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집'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는 게 아닙니다.
어떤 분은 안개가 자욱한 새벽의 푸르스름한 호수를 떠올렸을 겁니다.
어떤 분은 햇살이 쨍하게 비치는 정오의 반짝이는 물결을 떠올렸을 겁니다.
집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입니까, 아니면 현대적인 유리 저택입니까?
지붕은 뾰족합니까, 평평합니까?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습니까?
더 가까이 다가가 봅시다. 그 집의 현관문은 무슨 색깔입니까? 손잡이는 놋쇠로 되어 있나요, 아니면 차가운 스테인리스인가요? 그 손잡이를 잡았을 때의 촉감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는 냄새는?
제가 말한 건 "호숫가에 집이 있다"는 단 한 줄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미 그 문장을 바탕으로 지붕의 재질, 문의 형태, 심지어 공기의 온도까지 스스로 채워 넣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뇌가 가진 '세계관적 상상력'입니다.
세계관은 외부에서 억지로 주입하는 정보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단서(트리거)를 던졌을 때, 수용자의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Emerging) 총체적인 감각입니다.
한국인 A가 떠올린 이미지: 호숫가는 춘천, 안개, 아침, 카페로 연결됩니다.
왜 춘천일까요? 아마도 A는 과거 춘천 여행에서 호숫가 카페에 앉아 안개 낀 아침을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 경험이 A의 개인 라이브러리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미국인 B가 떠올린 이미지: Lake House는 Minnesota, 통나무집, 겨울, 낚시로 연결됩니다.
B는 어릴 적 할아버지와 미네소타 호수에서 낚시하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통나무집, 난로, 눈 덮인 겨울. 이것이 B의 개인 라이브러리입니다.
같은 문장, 완전히 다른 이미지.
왜?
각자의 키워드 라이브러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협업에서 문제가 됩니다.
창작자 A: "주인공이 호숫가 집에서 쓸쓸히 커피를 마시는 장면 그려주세요."
일러스트레이터 B: "네!"
며칠 뒤, B가 그림을 제출합니다. 밝은 여름 호수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장면입니다.
A: "아니, 이게 아닌데..." B: "호숫가 집이라고 하셨잖아요?"
같은 단어, 다른 라이브러리.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A의 머릿속 호숫가는 쓸쓸함, 겨울, 안개와 연결되어 있지만, B의 머릿속 호숫가는 여름, 휴가, 밝음과 연결되어 있을 뿐입니다.
두 가지 전략이 있습니다.
전략 A: 키워드를 추가하라
"호숫가에 집이 한 채 있다"는 너무 넓습니다.
"호숫가에 집이 한 채 있다. 통나무로 지어졌고,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
통나무, 굴뚝이라는 키워드가 추가되면서 범위가 좁혀집니다.
"호숫가에 통나무집이 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창문은 하나뿐이며, 문 앞에 낡은 의자가 있다."
점점 구체화됩니다. 독자의 라이브러리를 당신 쪽으로 유도하는 것입니다.
전략 B: 기존 세계관을 빌려라
"호숫가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같은 집이 있다"
월든 호수를 아는 사람은 즉시 연결됩니다. 키워드 100개를 한 문장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호숫가에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집이 있다"
지브리 라이브러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한 문장으로 세계관이 공유됩니다.
이것이 03화에서 배운 '신용 차입'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세계관 구축이란, 내 개인 라이브러리를 타인이 접근 가능한 형태로 문서화하는 작업입니다.
여기서 '스토리텔링'과 '세계관 설계'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둘을 대립 관계로 오해하는데, 실제로는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스토리텔링은 '선형적(Linear)'입니다. 주인공이 A에서 출발해 B를 거쳐 C로 가는 시간의 흐름입니다.
"철수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기서 영희를 만났다."
이것은 사건의 나열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독자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를 추적합니다.
세계관 설계는 '공간적(Spatial)'입니다. 철수가 문을 열기 전에, 그 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공간의 조명은 어두운지 밝은지, 벽에는 어떤 그림이 걸려 있는지를 구축하는 작업입니다.
시간이 멈춘 상태에서 공간의 밀도를 채우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웹툰을 그리거나, 넷플릭스 드라마를 찍거나, 언리얼 엔진으로 게임을 만든다면 "철수가 밥을 먹는다"는 한 줄의 지문만으로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습니다.
철수가 앉은 의자는 가죽인가, 천인가? 식탁 위에는 어떤 반찬이 놓여 있는가? 창밖의 날씨는? 조명의 밝기는? 철수가 입은 옷의 브랜드는? 벽지의 무늬는? 천장의 높이는?
이 모든 시각적 정보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수만 가지의 결정들이 중구난방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정서'를 향해 정렬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세계는 우울하고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니까, 의자는 차가운 금속이어야 하고, 조명은 녹색 톤이어야 해."
이것이 바로 세계관 설계입니다.
좋은 스토리텔링은 이미 공간 묘사를 포함합니다. 훌륭한 소설가는 단 몇 줄로 공간의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 덕분이었습니다.
AI 시대, 그리고 시각 매체 시대에는 이 '공간의 밀도'를 체계적으로 설계하는 능력이 필수가 되었습니다. 스토리텔링(시간)과 세계관 설계(공간)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완전한 창작물을 만듭니다.
과거 텍스트 소설 시대에는 스토리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각 매체 시대는 다릅니다. 웹툰을 그리거나, 넷플릭스 드라마를 찍거나, 언리얼 엔진으로 게임을 만든다면 모든 공간의 디테일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공간을 만드는 비용이 급격히 낮아지고 있습니다.
2021년 메타버스 열풍이 실패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3D 공간을 만드는 비용이 너무 높았습니다. 쇼핑몰 하나를 3D로 구현하려면 수십억 원이 들었지만, 게임만큼의 수익을 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2024-25년,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AI가 텍스트만으로 3D 공간을 생성합니다. 기존 수개월 작업이 수분으로 단축됩니다. 엔비디아 옴니버스, 로블록스, 포트나이트 창작 도구... 공간을 만드는 기술 장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 누구나 3D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차별화 요소가 될까요?
바로 '이 공간에 어떤 세계관이 흐르는가'입니다.
똑같이 생긴 두 개의 카페 공간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냥 의자와 테이블이 놓인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1920년대 파리 몽마르트 예술가들의 아지트'라는 세계관이 깃든 공간입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브랜드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LG전자의 브랜드 쇼룸을 메타버스 공간에 만든다고 칩시다. 단순히 LG 로고를 벽에, 의자에, 방석에, 의자 다리에, 타일에, 책상에 크게 박아놓는다고 해서 그 공간이 LG스러워질까요? 아닙니다. 촌스러울 뿐입니다.
진정한 브랜딩, 진정한 세계관은 로고를 떼어내도 느껴져야 합니다.
LG다운 의자는 어떤 디자인일까요? 아마도 부드러운 곡선과 따뜻한 가전의 느낌을 담고 있겠죠.
LG다운 조명은? 눈이 편안하고 기술적으로 세련된 빛일 겁니다.
LG다운 벽은? 깔끔하고 미래지향적인 재질일 겁니다.
이렇게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자, 벽, 문, 조명)에 브랜드의 철학(세계관)을 불어넣어, 사용자가 그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아, 여기는 LG의 세상이구나"라고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
이것이 공간 컴퓨팅 시대의 세계관 설계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그게 어떤 깔끔, 어떤 세련, 어떤 미래지향적인 거라는 거냐?"라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걸 전문가에게 맡기듯 AI에게 맡긴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을 전달해야 하는가? 그게 바로 키워드의 링크라는 것입니다.
LG다운 벽은 벽-재질이라는 키워드가 재질-깔끔, 재질-미래지향으로 연결되고 이 단어들은 LG의 키워드 클라우드로 연결되는 구조인 것입니다.
LG라는 브랜드 전체가 가진 수천 개의 키워드 클라우드, 그 거대한 연결망이 의자 하나, 벽 하나, 조명 하나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고가 없어도 "이건 LG다"라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LG다운 햇살과 LG다운 빗방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안에 LG로고가 하나하나 새겨지지 않더라도요.
이제 이 작업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왜냐하면 AI가 이 모든 것을 대신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미드저니나 스테이블 디퓨전 같은 생성형 AI에게 "집을 그려줘"라고 하면 1초 만에 그럴싸한 집을 그려줍니다. 하지만 그 집은 여러분의 세계관이 반영된 집이 아닙니다. 그냥 평균값의 데이터 덩어리입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AI에게 '세계관적 디테일'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냥 집이 아니라, 19세기 빅토리아 양식인데 사이버펑크가 섞인, 비에 젖은 축축한 질감의 집을 그려줘."
"의자는 가죽인데, 수백 년 동안 낡아서 헤진 느낌이어야 해. 왜냐하면 이 세계는 멸망 직전이니까."
여러분이 머릿속으로 '호숫가의 집'을 구체적으로 상상했던 것처럼, 그 디테일한 심상을 언어로 바꾸어 AI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래야 AI는 여러분의 손발이 되어 정확한 세계를 구축해 줍니다.
AI는 방대한 라이브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개인 라이브러리는 모릅니다.
나쁜 프롬프트는 이렇습니다.
"호숫가의 집 그려줘"
AI는 평균값 이미지를 생성합니다. 너무 일반적이고, 당신의 세계가 아닙니다.
좋은 프롬프트는 이렇습니다.
"호숫가의 집. 내 라이브러리에서 호숫가는 춘천이고, 집은 빨간 벽돌이며, 분위기는 쓸쓸함이다. 새벽 5시, 안개, 텅 빈 느낌."
AI가 당신 라이브러리의 연결망을 학습합니다. 당신의 세계를 생성합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 Obsidian에 당신의 키워드 연결망을 문서화하십시오. 호숫가는 춘천, 안개, 쓸쓸함과 연결됩니다. 집은 빨간 벽돌, 작다, 외롭다와 연결됩니다.
두 번째 단계, 전체를 Export하여 AI에게 컨텍스트로 제공하십시오.
세 번째 단계, 이후 모든 생성물이 당신의 라이브러리를 따릅니다.
"호숫가 집 그려줘"라고 하면 AI가 이미 학습한 라이브러리로 생성합니다. 일관된 세계관이 유지됩니다.
이것이 09화에서 배울 Obsidian + AI 연동의 핵심입니다. 당신의 라이브러리를 AI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문서화하면 AI는 당신의 '세계관 비서'가 됩니다.
결국 AI 시대의 창작은 이렇게 작동합니다.
스토리텔링(시간): "주인공이 폐허가 된 저택에 들어간다"
세계관 설계(공간): "저택은 100년 전 화재로 반쯤 무너졌고, 담쟁이 덩굴이 벽을 뒤덮고 있으며,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석양이 비춰 들어온다"
AI 실행: 위 두 가지를 종합하여 시각화
스토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한다면, 세계관은 '그 일이 일어나는 공간이 어떤 느낌인가'를 말합니다. 둘은 대립이 아니라 협주입니다.
세계관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의자를 놓을 것인가? 어떤 조명을 켤 것인가? 벽지의 무늬는? 천장의 높이는? 창밖 풍경은?
이 사소해 보이는 결정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완성합니다.
그리고 이제, AI라는 도구가 여러분의 결정을 즉시 현실로 만들어줍니다. 비용도 시간도 극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여러분의 세계관뿐입니다.
"호숫가에 집이 한 채 있다"
이 문장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를 5분 동안 키워드로 나열하십시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호숫가는 춘천, 안개, 새벽, 쓸쓸함, 회색과. 집은 통나무, 작다, 외롭다, 굴뚝, 연기와. 느낌은 이별, 정적, 커피, 혼자와 연결됩니다.
이 키워드들이 당신의 개인 라이브러리입니다.
이것을 문서화하면 협업자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고, AI에게 학습시킬 수 있으며, 10년 뒤에도 재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만의 세계관 라이브러리의 시작입니다.
06화에서 우리는 스타워즈가 50년간 핵심 클러스터를 유지하며 확장해온 비밀을 배웠습니다. 그 핵심 클러스터도 결국 누군가의 머릿속 "호숫가의 집" 같은 구체적 심상에서 시작했습니다.
조지 루카스의 머릿속에는 이런 장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막 행성에 소년이 쌍둥이 태양을 바라본다." 이 한 장면이 스타워즈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호숫가의 집"은 무엇입니까?
그 구체적인 심상을 키워드로 번역하십시오. 그것이 당신 세계관의 첫 번째 클러스터입니다.
다음 화에서 우리는 이 심상을 어떻게 '살아있는 세계'로 확장하는지 배웁니다. 날씨, 계절, 냄새, 소리까지. 세계의 기후를 설계하는 법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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