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사랑받은 K
K는 세계로 나갔습니다. BTS는 흑인 커뮤니티와 연대했고, <K-팝 데몬 헌터>는 N타워로 관광객을 불렀습니다. 코리안 타코는 LA의 문화가 되었고, <코코>는 멕시코 축제를 디지털로 만들었다가 다시 현실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K는 익숙해졌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K를 자기 방식으로 소비하고, 변형하고, 재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K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주객전도입니다.
익숙함. 세계관 스토리텔링에서 익숙함이야말로 진짜 자산입니다. 05화에서 우리는 관광객과 주민의 차이를 배웠습니다. 관광객은 일회성으로 소비하지만, 주민은 계속 머뭅니다. 그리고 익숙함이 관광객을 주민으로 만듭니다.
이제 질문이 남습니다. 이 익숙함을 지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K가 세계로 나간 만큼, 우리는 세계를 받아들여야하는 책임과 필요가 남습니다. 이것은 받은만큼 돌려주자는 호혜적인 선언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섭리입니다.
고려인은 1860년대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이주한 한민족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150년 넘게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광주 고려인 마을에 안다리아와 문클라브디아라는 두 자매가 있습니다. 그들은 떡과 케이크 장인입니다. 한국 떡을 만들지만, 러시아식 장식을 입힙니다. 러시아 케이크를 만들지만, 한국 재료를 사용합니다.
그들의 떡은 한국 떡이 아닙니다. 러시아 케이크도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제3의 것입니다. 광주 사람들은 그 떡을 삽니다. 맛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떡 안에 러시아가 녹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이주문화가 로컬에 정착하는 방식입니다. 조용하게, 자연스럽게, 맛있게.
서울 대학가에 마라탕 가게가 넘쳐납니다.
마라탕은 중국 쓰촨성의 매운 탕 요리입니다. 2010년대 중반, 한국에 중국인 유학생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을 위한 중국 음식점이 생겼습니다. 마라탕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인들만 먹었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너무 맵다"며 외면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시도했고, SNS에 올렸고, 입소문이 났습니다. "이거 진짜 맵긴 한데 중독성 있어."
이제 마라탕은 한국 대학생들의 소울푸드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마라탕은 중국의 마라탕과 다릅니다. 덜 맵습니다. 당면이 들어갑니다. 치즈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중국 유학생들이 웃습니다. "이게 무슨 마라탕이야?" 하지만 한국 학생들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맛있으니까요.
짜장면이 그랬듯이, 마라탕도 한국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유학생들이 가져온 이 음식 문화는 이제 한국 로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안산에는 다문화 거리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중국,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모여 삽니다. 각자의 식당을 열고,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각자의 명절을 기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들은 한국 사회에 동화되지 않는다. 자기들끼리만 모여 산다." 하지만 거리를 걸어보면 다른 풍경이 보입니다.
베트남 쌀국수 집에서 한국 대학생들이 밥을 먹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빵집에서 한국 아주머니가 난을 삽니다. 네팔 식당에서 한국 직장인들이 카레를 먹습니다. 그리고 그 식당 주인들은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손님의 입맛을 배우고, 조금씩 메뉴를 바꿉니다.
이것이 크레올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억지로 동화시키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섞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안산의 베트남 쌀국수는 베트남의 쌀국수와 달라질 것입니다. 한국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베트남의 정서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이주자가 로컬에 정착하면, 그들이 가져온 문화는 과도기적 상태가 됩니다. 아직 동화되지 않았지만, 이미 심어진 문화. 광주 고려인의 떡, 서울의 마라탕, 안산의 다문화 거리. 이것들이 바로 과도기적 문화입니다.
이제 로컬에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거부입니다. "저건 우리 문화가 아니야. 저들은 한국에 왔으면 한국식으로 살아야지. 자기들 문화를 고집하면 안 돼." 이렇게 말하며 벽을 쌓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이주문화는 주류와 섞이지 못하고 고립된 섬이 됩니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앙클라브(Enclave)라고 부릅니다. 고립된 문화 공동체.
앙클라브가 만들어지면 분리와 갈등이 생깁니다. "저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인식이 강화됩니다. 로컬은 다양성을 잃고, 창의성을 잃고, 결국 쇠락의 길로 갑니다.
두 번째는 받아들임입니다. "맛있네? 뭐가 들어갔어? 아,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 우리 것이랑 섞으면 어떨까?" 이렇게 말하며 실험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짜장면이 탄생하고, 마라탕이 한국화되고, 고려인의 떡이 광주의 명물이 됩니다.
언어학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가 섞여 새로운 문법 체계를 만들 때 이것을 크레올(Creole)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 개념을 빌려, 문화가 섞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크레올(Kreole)이라 부르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면 K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2024년, 한국에서 나온 사극 드라마들을 세어보십시오. 대부분 조선시대입니다. 판타지는 어떻습니까? 구미호, 도깨비, 저승사자... 같은 소재가 반복됩니다. 한국 전통 소재만 고집하면 금방 고갈됩니다.
하지만 광주 고려인의 떡을 보십시오. 한국 떡에 러시아 장식을 더했더니 완전히 새로운 것이 탄생했습니다. 마라탕을 보십시오. 중국 탕에 한국 입맛을 더했더니 대학가 소울푸드가 되었습니다.
외부 재료에 한국 요리법을 더하면 무한하게 확장됩니다.
K-팝을 생각해 봅시다. 10화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미국 힙합, 유럽 EDM, 일본 아이돌 시스템... 모두 외국에서 왔습니다. 하지만 K-팝은 K-팝입니다. 왜? 한국적 방식으로 요리했기 때문입니다.
서편제로 유명한 판소리를 생각해 봅시다. 판소리는 정/한/흥을 자로 재며 만든 게 아닐겁니다. 당시의 치열한 연구와 훈련으로 그렇게 불러왔고, 그 안에 정서가 자연스럽게 담겼습니다. 후대의 연구자들이 나중에 분석했습니다.
"아, 한국 전통 예술에는 정서적 공통점이 있구나. 이걸 정/한/흥으로 이름붙여 정리해보자."
이것은 발견입니다. 발명이 아닙니다. K의 문화로 자란 사람이 K의 정체성을 감추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원어민이 무의식적으로 원어민 발음을 하듯이.
그렇다면 외국 문화를 받아들여도 K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K가 그 문화를 K로 만듭니다. 중국 면이 한국에 오면 짜장면이 되듯이. 중국 마라탕이 한국에 오면 한국식 마라탕이 되듯이. 러시아 케이크가 광주에 오면 고려인 떡케이크가 되듯.
기존의 연구와 개념이 물론 굉장히 유용하고 또 피할 수 없지만 세계관의 제작자는 단순하게 기존 연구의 분류명을 키워드로 사용하여 개념을 그 안에 가두면 안됩니다. 예전에는 연구의 특징과 한계 때문에 기억하기 좋고 구분하기 좋은 돌림자나 서너가지 분류였지만 지금은 가장 사소한 하나가 빛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10화에서 우리는 K가 플랫폼이 되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캣츠아이, 리사, 로제... 외국인도 K를 만듭니다. 글로벌 K는 이미 히스패닉이고, 블랙이며, 양키이고, 폴리네시안입니다.
하지만 K의 주도권은 여전히 한국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도권을 지키는 방법은 순혈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더 많이 섞일수록, K의 정체성은 더 강해집니다.
왜? 한국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하며 모든 것이 K로 변환되기 때문입니다.
미국 영어를 생각해 봅시다. 외국인도 미국 영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영어의 트렌드를 만드는 건 뉴요커입니다. LA 사람들입니다. 미국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슬랭을 만들고, 새로운 억양을 만들고, 새로운 표현을 만듭니다.
K도 마찬가지입니다. K-팝의 시스템을 만든 건 한국이고, K-팝의 트렌드를 이끄는 건 한국이고, K-팝의 정서를 정의하는 건 한국입니다. K의 주도권은 여전히 한국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도권은 "더 우월한 한글" 때문이 아닙니다. "더 위대한 전통문화" 때문도 아닙니다. K라는 글씨가 이미 강인하게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K는 익숙하고 친숙하면서도 새롭고 힙한 것. 이 균형을 유지하며 계속 진화하는 것. 본질을 깨우치고 연결을 확장하며 더 많이 이해하고 위로하는 것. 그것이 K의 주도권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순혈의 K는 보그와 엘르가 프랑스 전통문화에만 매달리려는 것만큼이나 무모합니다. K가 하면 K힙입니다.
인구절벽은 현재 한국이 당면한 가장 큰 사회 문제입니다.
한국의 출산율은 낮고 노동인구는 줄어들어 그 자리를 빠르게 새로운 사람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이주자는 붕괴위기의 로컬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일할 사람, 함께 살 사람, 문화를 나눌 사람. 그리고 그들이 오고 있습니다. 이주자들이 한국으로 옵니다. 일하러, 공부하러, 살려고 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문화를 가져옵니다.
처음엔 당연히 자국이 주도하는 자국의 문화였겠지만 곧 식재료를 포함한 한국의 물자를 조달하고 구성함으로서 피지컬과 로지컬 양쪽에서 과도기적 형태가 나타납니다.
과거 같았으면 우리는 벽을 쌓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것만 지키자. 외부는 오염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우리에게 그들이 필요하고, 그들도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광주의 떡이 더 풍성해지고, 서울의 마라탕이 새로운 소울푸드가 되고, 안산의 거리가 더 다채로워집니다. 필요가 문화적 풍요를 만들고 있습니다.
일제와 미제, 서양의 유행, 경양식, 한국도 서양의 어떤 것들, 가령 1976년 한국 최초의 패스트푸드점인 롯데리아 1호점에 양복과 한복, 꼬까옷을 입고 줄서서 기다리던 시절. 패밀리 레스토랑이 고급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같던 시절. 그 훨씬 이전에는 경+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라이스로 하시겠습니까? 빵으로 하시겠습니까?’라며 정중하게 묻던 시절과는 또 다른 흐름입니다. 열화된 유행의 흉내가 아니라 수용과 확장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문화적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이식된 문화를 향해 순혈주의라는 면역 거부 반응을 보인다면, 이 문화는 주류와 섞이지 못하고 고립된 앙클라브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분리와 갈등의 씨앗이며, 결국 로컬은 쇠락의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섞인다면, 새로운 것이 피어납니다. 이 역동적인 융합과 생성의 과정을 진정한 문화다양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문화다양성은 이식된 문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섞임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피워내는 정신입니다.
저는 이것을 Kreole Kulture라고 부르겠습니다. K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라 플랫폼이며, 그 진화형이 바로 이것입니다.
10화에서 우리는 K가 세계로 나가는 외적 순환을 보았습니다. BTS가 흑인 커뮤니티와 연대하고, 코리안 타코가 LA의 문화가 되고, <K-팝 데몬 헌터>가 전 세계에 K를 익숙하게 만들었습니다.
11화에서 우리는 세계가 K로 들어오는 내적 순환을 봤습니다. 광주 고려인이 떡을 만들고, 중국 유학생이 마라탕을 퍼뜨리고, 안산 다문화 거리가 한국 로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외적 순환과 내적 순환. 나가기와 받아들이기. 주기와 받기. 이 두 순환이 만나는 지점에 Kreole Kulture가 있습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한국식 유교를 만들었고, 불교를 받아들여 한국식 불교를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서양 팝을 받아들여 K-팝을 만들고, 중국 마라탕을 받아들여 한국식 마라탕을 만들고, 러시아 케이크를 받아들여 고려인 떡케이크를 만듭니다.
K는 성(城)이 아닙니다. 벽을 쌓고 안을 지키는 요새가 아닙니다. K는 한강입니다. 무엇이든 흘러들어오면, 우리만의 흐름으로 섞이고, 우리만의 물살로 휘저어지고, 완전히 새로운 물결로 흘러나갑니다.
강은 멈추지 않습니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살아있습니다. 상류에서 내려온 것과 하류로 흘러갈 것이 끊임없이 만나고 섞이며 새로운 흐름을 만듭니다.
우리의 미래는 외부에서 흘러온 문화를 막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여 우리만의 물살로 휘저은 뒤, 완전히 새로운 흐름으로 바다로 세계로 흘려보내는 데 달려 있습니다.
외부의 키워드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외국의 장르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다른 문화의 스토리텔링을 망설이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오염이 아닙니다. 씨앗입니다.
10화에서 우리는 배웠습니다. K가 세계로 나가며 익숙함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K-팝 데몬 헌터>를 보고 N타워를 찾는 사람들. 코리안 타코를 먹고 한국 음식에 관심 갖는 사람들. 이들은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도움 없이도 K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11화에서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 익숙함을 지속하려면 내부에서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광주 고려인의 떡, 서울의 마라탕, 안산의 다문화 거리. 이것들이 K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북유럽 신화도 아니고 한국 전통 설화도 아닌, 제3의 새로운 신화를 만드십시오. 당신 안에는 이미 K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모든 문화도 당신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북유럽 신화 더하기 당신의 K는 새로운 판타지가 됩니다. 미국 SF 더하기 당신의 K는 승리호가 됩니다. 일본 데스게임 더하기 당신의 K는 오징어 게임이 됩니다. 중국 마라탕 더하기 당신의 K는 한국식 마라탕이 됩니다.
우리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K라는 정서와 전 세계 문화라는 재료고. 그것은 K로 피어날 것입니다. 당신이 요리한다면.
움추러들지 말고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섞이십시오. 대담하게, 적극적으로, 치열하게. 그리고 그 K가 세계의 새로운 표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크레올의 힘입니다. 이것이 Kreole Kulture입니다. 이것이 외적 순환과 내적 순환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음악은 위로가 되고, 위로는 연대가 되고, 연대는 문화가 되고, 문화는 다시 음악이 됩니다. 디지털이 피지컬을 만들고, 피지컬이 다시 디지털이 됩니다. 세계가 K가 되고, K가 다시 세계가 됩니다.
이것이 하모니입니다. 이것이 K-콘텐츠의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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