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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더 낮은 곳으로 흐른다.

우리는 왜 만나지 않는가?

by 김동은WhtDrgon

금요일 저녁, 오랜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옵니다. "차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할까?" 마음은 간절하지만, 현실은 냉정합니다. 교통비, 시간, 에너지. 결국 "다음에"라는 익숙한 답변으로 끝나죠.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연결된 시대를 살면서도, 실제로는 가장 만나지 않습니다. 왜 페이스북에서 이야기하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나누지 않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비용 때문입니다.


메타버스의 미래를 확신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미래가 펼쳐져서가 아니라, 가장 가성비 좋은, 제일 싼 곳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 흐름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흐르는 물은 막을 수 없다

역사를 보면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미 있던 자리의 것들을 교체했죠. 산업혁명의 증기 기계는 공장이 먼저 세워진 뒤에야 장인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장인들은 분노했을 겁니다. 수십 년 갈고닦은 손기술이, 덜컹거리는 기계로 대체되는 걸 지켜보며.


메타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친구와 만나고, 일하고, 배우는 사회적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타버스는 그 안의 '고용량' 요소들을 '저용량'으로 교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 목소리, 표정. 이 모든 것은 고용량입니다. 만남 하나에도 시간과 에너지가 듭니다.


세상은 언제나 이런 불가피한 요소들을 더 단순하고 저렴한 프로세스로 바꿔왔습니다. 편지가 전화로, 전화가 문자로, 문자가 하트 버튼으로. 그렇게 원가를 절감하며 저용량으로 흘러온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이 흐름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강물을 손으로 막을 수 없듯이.


'했다치는' 축약의 세계

메타버스는 마치 그 역전처럼 보입니다. 링크와 글자의 웹을 비주얼한 공간으로, VR로 현실감 있게 바꾸고 더 나아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문서를 저용량으로 만든 웹에, 대면마저 저용량으로 우겨넣는 시도입니다. 단순히 연결하는 게 아니라, 행동 비용 자체를 축약합니다.


현실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과, 가상 공간에서 함께 창작하는 것은 다릅니다. 메타버스에서는 함께 놀고, 창작하고, 복제하는 방식으로 소통합니다.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2021년의 열풍 이후 실패의 상징으로 박제되어, 이제 공간 컴퓨팅이나 다른 용어들이 등장하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실 유니버스를 가상 유니버스로 교체하는 작업... 이 흐름은 막을 수 없습니다.


하트 하나 누르는 것처럼 간단한 행동이 협업의 씨앗이 되고, AI가 그 나머지를 실시간으로 렌더링해 그럴듯하게 채워넣습니다. 복잡한 장면 구성 대신 핵심 행동만 남기고, "이걸 여기 놓아"라는 한 마디로 세계가 바뀝니다. 그 안의 미장센들은 계속 줄어듭니다. 해석하는 데 드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겁니다. 효율적이죠. 빠르고, 싸고, 접근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좋은 걸까요?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세대 갈등이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표제어는 늘어났지만 생각은 얕아진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구텐베르크 시대에도, 스마트폰 시대에도 말입니다.

어쩌면 맞는 말일 겁니다. 지식은 압축되고 키워드로 쪼개졌습니다. TikTok 클립 하나로 세상을 훑고, 하트 하나로 공감을 표현합니다. 깊이는 희생됐지만, 속도와 연결은 폭발했죠.


이것을 효율적 진화라고 말하기엔 뭔가 씁쓸합니다. 친구와 세 시간 걸려 카페에서 나눈 대화와, 메시지 창에서 주고받은 이모지 열 개가 같은 무게일까요? 아이가 할머니 무릎에 앉아 듣는 옛날이야기와, AI가 생성한 동화책이 같은 온기를 줄까요?


우리는 뭔가를 잃어버렸습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잃어버렸습니다.


과거는 비싸진다

여기서 중요한 깨달음이 옵니다. 미래가 싸지는 만큼, 과거는 비싸집니다.

손편지를 쓰는 일. 친구 집을 직접 찾아가는 일. 두 시간 걸려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아날로그 레코드판을 튼 다음 소파에 앉아 앨범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일. 이런 것들은 이제 '비싼' 취미가 됐습니다.

시간이 들고, 에너지가 들고, 돈이 들고, 무엇보다 '집중'이 듭니다.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합니다. 한 사람, 한 순간, 한 경험에만 몰입해야 합니다. 효율이 형편없죠.

하지만 바로 그래서 값진 겁니다.


산업혁명 이후 손으로 만든 가구가, 장인이 짠 직물이, 수작업 시계가 더 비싸지고 귀해졌듯이. 디지털 혁명 이후 아날로그 경험이, 고용량 커뮤니케이션이, 느린 관계가 더 비싸지고 귀해지는 겁니다. 할머니가 동화책을 읽어줄 수 있는 환경이 너무나 비싸진 겁니다.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저용량의 효율로 흘러갈 것인가, 고용량의 깊이를 지킬 것인가.


그래도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솔직히 말하면, 선택의 여지가 크지 않습니다. 물줄기는 이미 흐르고 있고, 우리는 그 안에 있습니다. 메타버스는 올 겁니다. AI는 더 발전할 겁니다. 행동 비용은 계속 축약될 겁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공부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서로 사랑하고, 가정을 이루며 나아갈 겁니다. 다만 그 방식이 조금씩 바뀔 뿐입니다. 가상 교실에서 배우고, 디지털 선물로 존경을 표현하고, 메타버스에서 데이트하고, AI 비서의 도움으로 육아를 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저용량 미래가 가져다주는 혜택도 분명 있습니다. 국경이 사라진 교육, 장애가 사라진 소통, 거리가 사라진 협업. 절망의 안전망으로 작동하는 가상 복지. 고립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디지털 치료제. 싸구려 약을 비웃는 사람은 지옥에 갈겁니다. 여기 정말로 대단한 효용이 있습니다.


큰 물줄기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다면, 그 흐름을 타고 가되, 우리가 무엇을 타고 있는지는 기억해야 합니다.


편린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말 것

하지만 여기서 함정이 있습니다. 효율의 바다에 떠내려가다 보면, 조각난 경험의 편린들을 인생의 전부로 착각하게 됩니다.

하루에 수백 개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수십 명과 짧은 메시지를 주고받고, 무한히 스크롤하다 보면, 뭔가 많은 걸 경험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클립의 조각들, 댓글의 파편들, 좋아요의 잔상들. 손에 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진짜 위험입니다. 저용량의 편린을 모으는 데 인생을 쓰는 것. 빠르고 싸고 쉬운 것들만 쫓다가, 느리고 비싸고 어려운 것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것.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과거의 비싼 취미들에 의식적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친구를 직접 만나는 일. 편지를 쓰는 일.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일. 산책하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일. 이런 일들은 이제 '럭셔리'가 됐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더 귀하고, 더 필요합니다.


둘째, 고용량 커뮤니케이션의 해석을 더 음미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표정에서 읽히는 미묘한 감정. 목소리 톤에 담긴 진심. 침묵이 전하는 메시지. 이모지 하나로는 절대 전달할 수 없는, 인간의 비선형적이고 고용량인 소통. 이것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정말로 바보가 됩니다.


셋째, 저용량 미래를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도 깊이를 찾아야 합니다. 메타버스에서 놀더라도, 의미 있는 창작을 하는 것. AI를 쓰더라도, 내 생각을 깊이 있게 표현하는 것. 하트를 누르더라도, 진심을 담아 누르는 것.


자조와 위로 사이에서

솔직히 말하면, 저도 확신이 없습니다. 이 흐름이 정말 옳은지,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어쩌면 우리는 효율의 이름으로 영혼을 조금씩 팔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편리함의 대가로 깊이를 포기하고, 속도의 대가로 의미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로도 됩니다. 인류는 항상 이런 전환기를 겪어왔고, 그때마다 "요즘 아이들은" 타령을 했지만, 결국 적응했고,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하고 배우고 살아갔습니다.

메타버스에서도 진짜 우정이 생길 겁니다. AI 시대에도 깊은 사유가 가능할 겁니다. 저용량 미래에도 고용량의 사랑은 존재할 겁니다.


다만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노력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차 한 잔의 무게

미래는 더 싼 곳으로 흐릅니다. 이건 팩트입니다.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싼 것으로만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비싼 과거를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친구와 직접 만나 차를 마시는 그 '비효율적인' 시간에, 어쩌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AI가 나머지를 그럴듯하게 실시간으로 무엇보다 화려하게 채울 수 있지만 그건 저용량을 향한 배경 스트리밍일 뿐입니다. 차창 밖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옆자리의 사람에게 있습니다.


창작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디지털 세계에서, AI 시대에도 창작의 시드와 중심은 나의 정체성에 있습니다. 포스팅과 브런치 글, 그 모든 디지털 흔적의 핵심에는 여전히 '나'라는 고용량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저용량의 큰 물줄기를 타고 가되, 때때로 강둑에 올라 쉬어가는 것. 편린을 모으는 게 아니라, 진짜 경험을 쌓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이 아무리 빨리 돌아가도,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들과는 느리게, 비싸게, 고용량으로 소통하는 것.


어떤 우리들은 공짜라며 마구 써대는 현란한 실시간 라이브 세리프의 천박한 홍수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며 다시 장식을 제거하고 손으로 쓴 산세리프의 우아한 세계로 가게 될 겁니다.


미래는 더 싼 곳으로 흐릅니다. 하지만 진짜 값진 것들은 여전히 그리고 더욱 비쌀 겁니다. 그걸 알아볼 사람들이 우리 밖에 없을지라도요.


그리고 그게 다행입니다.


#미래는더싼곳으로흐른다


김동은WhtDrgon@MEJ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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