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은 땅이 아니라 시간이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났습니다. 개막식과 폐막식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수호랑과 반다비는 어디로 갔을까요? 창고로 갔습니다. 인형 탈은 보관소에 넣어졌고, 아르바이트생은 다른 일을 찾아갔고, SNS 계정은 업데이트가 멈췄습니다. 2012년 여수 엑스포의 여니와 수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 대부분 지자체 마스코트의 운명입니다. 엑스포, 올림픽, 월드컵처럼 화려한 무대가 끝나면 함께 사라져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22화에서 우리는 배웠습니다. 캐릭터에게 일상이 없으면 인격이 없다고요. 수호랑은 올림픽 기간에만 존재했고, "올림픽 마스코트"라는 역할만 부여받았습니다. 올림픽이 끝나자 그 역할마저 사라졌고, 존재 이유도 함께 증발해버렸습니다.
"수호랑은 평소에 뭐 하고 놀까?", "수호랑은 뭘 먹을까?", "수호랑은 퇴근하면 어디로 갈까?" 이런 질문에 답이 없습니다. 서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캐릭터가 아니라 '가면'입니다.
전국 지자체 홈페이지를 돌아다녀 봅시다. 기괴한 캐릭터들이 환영합니다. 고추를 머리에 쓴 아가씨, 마늘 모양 모자를 쓴 소년, 감자 눈을 가진 할아버지. 이들의 공통점은 "우리 군을 홍보하러 태어났어요"라는 목적성뿐입니다. 성격도 없고, 취향도 없고, 고민도 없습니다. 그저 특산물을 머리에 이고 서 있을 뿐입니다.
홍보의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은 광고를 싫어하거든요. "우리 지역 좋아요! 놀러 오세요!"라고 외칠수록 외면당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좋아합니다. "저 캐릭터 오늘 뭐 했대?", "어제 무슨 일 있었대?", "다음 주에 무슨 일 생긴대?" 이렇게 궁금해하고, 관심을 갖고, 찾아갑니다.
고추 아가씨는 홍보라는 기능만 있을 뿐이고, 요즘 사람들은 종업원에게 안부나 기분을 묻는 그런 말을 걸지 않는게 예의입니다.
2011년 11월, 일본 치바현 후나바시시에서 한 시민이 3만 6천엔(약 36만원)을 들여 중국에서 인형 탈을 주문했습니다. 후나바시의 특산물인 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 후낫시 "ふなっし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시청에 공인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시민 축제 참가를 요청했지만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난입했습니다.
2012년 8월 후나바시 배 홍보 행사장에 허가 없이 나타나 "햣하-!"라고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녔습니다. 시장은 격노했습니다. "무슨 정체 모를 괴물이 우리 행사를 망치고 있어!" 하지만 사람들은 웃었습니다.
2012년 11월 유루캬라 서밋(일본 지역 캐릭터 축제)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했을 때, 누군가 물었습니다. "어텐드(대신 말해주는 사람) 어디 있어?" 일반적으로 유루캬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디즈니 원칙이죠. 캐릭터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침묵해야 한다는 것, 미키마우스가 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요.
후낫시가 대답했습니다. "없다낫시!" 인형 탈 안에서, 직접, 목소리로요. 이것이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과거 캐릭터는 05화에서 봤던 4레이어 구조에서 4계층(세계관)과 3계층(배역) 사이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명확한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침묵해야 했죠. 말을 하는 순간 "안의 사람"이 드러나고 환상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낫시는 말했고,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돈 얼마 있어?"라는 질문에 "274엔나시!"(숫자+후나시의 말장난)라고 즉석에서 대답하는 임기응변, 살아있는 존재로 느껴졌던 겁니다.
2019년 한국에서 펭수가 등장했습니다. "야, 너 왜 그래?", "나 돈 많이 벌고 싶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펭수는 후낫시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캐릭터가 직접 말하는 시대가 왔고, 게임에만 존재하던 세계관 설계 기법이 이제 로컬 캐릭터에게도 필요한 시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2011년 일본 구마모토현에 큰 눈망울의 검은 곰 캐릭터가 등장했습니다. 쿠마몬(くまモン), 이름부터 구마모토 지역의 곰(쿠마)입니다. 하지만 쿠마몬은 다른 지자체 마스코트와 달랐습니다. 영업부장 직함을 받았거든요.
명함이 있고, 결재 서류를 처리하고, 출장을 가고, 현청(縣廳, 도청 같은 곳)에 출근합니다. 그리고 실수를 합니다. 서류를 잃어버리고, 다이어트에 실패하고, 가출 소동을 벌이고, 일 처리가 서툽니다. 사람들은 웃었습니다. "쿠마몬, 또 사고 쳤네."
현청은 쿠마몬에게 "구마모토현을 홍보하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번 달 목표 달성 못 하면 월급 삭감이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쿠마몬을 홍보 대사로 보지 않고 어리숙한 직장 선배로 봤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연 매출 1조 5천억 원, 구마모토현 경제 효과는 측정조차 불가능할 정도였고, 전 세계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왜 성공했을까요? 사람들은 "구마모토현에 놀러 오세요"라는 말에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쿠마몬이 잃어버린 볼을 찾으러 다닌다"는 스토리에는 움직였던 겁니다.
후낫시와 쿠마몬, 이 둘이 증명했습니다. 홍보가 아니라 서사가 성공한다는 것을요.
"요즘 거기 대박이래!" 친구가 말합니다. SNS에서 봤답니다. 줄 서서 기다린답니다. 사진 찍으면 예쁘답니다. 큰맘 먹고 갑니다. 2시간 기다립니다. 사진 찍습니다. 인스타에 올립니다. 6개월 후, 그 가게는 폐업합니다. 이것이 핫플레이스의 운명입니다.
04화에서 우리는 관광객과 주민의 차이를 봤습니다. 관광객은 약탈적으로 소비하죠. 신기한 것을 보고, 사진 찍고, 떠납니다. 다시 오지 않습니다. 핫플레이스는 "경험의 시간"입니다. 일회성이고, 이벤트성이고, SNS 인증용이며, 트렌드가 바뀌면 소멸합니다.
그런데 로컬은 다릅니다. 로컬은 "습관의 시간"입니다. 매일 지나가는 출퇴근길, 단골 카페, 저녁 산책로처럼 삶의 루틴 속에 녹아든 공간입니다. 핫플레이스는 큰맘 먹고 가는 곳이라서 셋업 코스트(Setup Cost)가 높습니다. 시간을 내고, 교통편을 알아보고, 대기 시간을 감수해야 하죠. 로컬은 그냥 가는 곳이라서 셋업 코스트가 낮고, 제로에 수렴합니다.
제주도를 봅시다. 과거 제주도는 1년에 한 번 가는 "특별한 휴가지"였습니다. 큰맘 먹고 계획하고 비용을 쓰는 곳이었죠. 현재 제주도는 주말에 훌쩍 떠나는 "일상 여행지"가 됐습니다. 저가 항공과 에어비앤비 덕분에 셋업 코스트가 낮아졌고, 반복 방문이 늘었습니다. 이벤트에서 루틴으로 바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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