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절대 조건은 기다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기다리지 않아요
기다리는 이유는 좋아하니까
기다리면 올까 봐 기다리다가 안 오면
차라리 (내가) 가면 되니까
그러려면 먼저 기다려야 해
기다리는 건 그만큼 참을 수 있다는 거고
참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마음을 웅크리는 시간을 견디겠다는 것
이걸 스스로에 대한 약속, 의지로
합리화할 수 있겠지만
대상이 타인이라면 결국 기대하는 것
기다리면 올 거라고
오면 좋으니까 오면 기대가 채워지는 것
오면 원하던 일이 일어나는 것 오면 기분이 좋은 것
오면 기쁘고 행복한 것
기다리면 얻을 수 있다고 상상하지
기다려도 오지 않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고
기다려도 실망하고 망하고 최악이 되어도
기다리는 동안은 환각에 빠져들어
기다리는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기지
(나는) 기다리는구나
기특하구나 기다리다니 이렇게까지 기다리다니
이렇게까지 기다리면 이렇게까지 기다린 만큼
뭔가 거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까
상상할 순 없지만 그런 혜택이 있지 않을까
너무 고대하면 속물 같지만 그래서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연결된
기분이 들어서 너무 좋지 않은가
기다리는 건
연결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는 것
믿음을 견고히 지켜내는 것
과거를 어여쁘게 포장하는 것
기억의 마당을 쓸고 유리를 닦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영수증을
가지런히 모아두는 것
이런 태도가 상대를 기분 좋게 해 줄 거라고
웃게 할 거라고 좋은 반응을 유도할 거라고 어쩌면
감동할 거라고 (내게) 좋은 말을 해줄 거라고
가치를 인정해 줄 거라고 뭉클해할 거라고
상상하는 것, 빈 의자를 바라보며
불 꺼진 테이블에 홀로 앉아
구겨진 편지를 꺼내 읽으며
오래전 선물 상자를 만지작 거리며
전화기를 100% 충전으로 유지하며
꺼진 밤과 고요한 낮과 똑같은 길을 다니며
계절의 폭력 속에서 기어이 죽지 않는 것
환상을 조립하고 대사를 읊조리며
불면을 끌어안고 시간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
기억을 얇게 접어 상자가 되어 당신의
호흡이 담길 무형의 공간이 되어 있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 남겨진 존재가 되는 것
재와 먼지가 되어도 흩날리지 않는 것
바닥에 떨어진 점이라도 되거나
새끼손가락에 감길 끈이라도 되거나
방금 떨어진 물자국이라도 되거나
진하게 찍한 발자국이라도 되는 것
기다리는 자신을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는지
기다리는 일, 기다려도 당신은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일, 이걸
우리를 위한 일이라고 여기는 일
우리를 기다리는 일
기다리며 이런 걸 쓰는 일
관계*의 첫 번째 사전적 정의를 무시하는 일
(*명사.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아직 모르는 뭔가가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거나한 허영 속에서 어쩌면 과거의 나를 지우는 일
빈칸에 이름 쓰는 일 아니면 혼자 걸으며
자주 하는 말을 대신 쓰는 일,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싶은 말을 쓰며 듣고 싶은 말을 하며
좋아하는 일 좋아한다고 말하며
기다리는 일을 좋아하는 일을 쓰며 말하며
기다리는 일을 좋아하는 일